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Friday, February 13 (2026)

by sw

올해부터는 어느 곳엘 가든 책을 한 권은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그래야 틈틈이 읽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나름의 좋은 효과를 내고 있다. 2026년 2월, 13일의 금요일인 오늘까지는 말이다. (이 글은 2월 13일 금요일에 쓴 메모 조각들을 이어 붙인 형태다.)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점점 멍청해진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해서가 더 크다. 내가 누군가를 멍청하다고 자신 있게 단정할 수 있는 까닭은, 일단 나부터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함부로 멍청한 사람이라고 하는 건 무례한 게 되지만, 스스로를 포함해 칭한다면 그건 자기 객관화, 메타인지에 가깝다.

이 날 이 포춘쿠키를 뽑고 나서, 우리 팀이 ULI Hines 대회에서 Finalist에 들 거라고 확신했다. 운은 개뿔도 믿지 않기로 했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였다. 연초에 짧게 서울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왔는데, 촌놈답게 서울 시내를 오래 싸돌아 다니면 금방 지친다. 그럴 때면 어느 지점이든 상관없이 가까운 교보문고를 찾는데, 이 날은 강남점이었다.


교보문고 특유의 향은 (당시 기준) 올해 누적 독서량 0권에 빛나는 나도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강남점은 다이칸야마 츠타야보다도 더 멋들어진 책방이라 생각한다. 다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 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한 친구의 퇴근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결국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프랑스 작가들을 한 때 세대를 가리지 않고 무진장 좋아하고 파고들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든가, 조금 더 올라와서 윤리와 사상을 공부할 때 대뜸 빠졌던 사르트르, 훈련소와 소방학교 때 닥치는 대로 읽었던 기욤 뮈소,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그런데 마치 프랑스 북부의 릴에서 친구의 가족들과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는 내내 국물과 김치가 사무치게 그리웠듯이, 어느 임계치를 넘기고 나니 한동안은 손이 가지 않았다. 특유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정 묘사, 독자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한 끝없는 불륜, 그리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들.


순례자의 길을 다 걷고 한동안 메말랐던 생각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자연스럽게 손에 집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꽤 여운이 오래 남는 책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연상에게 늘 끌렸던 만큼 시몽의 입장이 되어 책을 읽어 나갔을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폴이 된 것 마냥 읽는 내내 덩달아 스트레스와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껴가며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던 기억이 난다. 폴은 결국 폴다운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나다운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작중 폴은 나와 띠동갑이었다. 내가 12년이 지나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면 폴처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재밌었던 일을 하나 덧붙이자면, 첫 다섯 장 가까이를 읽을 때까지도 폴이 남자, 로제가 여자라고 생각하고 읽어 나갔다. 아직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지 않고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폴이 여자고 로제가 남자라는 사실만 알고 읽어도 초반부가 훨씬 수월하게 읽힐 것이라고 전하고 싶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다. 기존 출발 일정이 월요일 아침이었는데, 보스턴과 뉴욕에 Snow Storm이 시작되면서 비행 일정이 무려 나흘이나 미루어졌다. 부모님이 되게 좋아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에서 가장 앞에 두는 가치가 점점 명확해진다. 예전에는 가족은 한참 뒤로 가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맨 앞에서 바로 찾을 수가 있다.


<설국>을 읽는 내내 눈이 가득 덮인 일본의 설경을 쉽게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가 책을 읽기 단 일주일 전까지 할아버지의 구순을 맞아 함께 후쿠오카에 다녀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읽다 보면서 그 이유가 야스나리의 문체와 그 문체를 있는 그대로 살린 번역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읽는 내내 고마코보다는 요코라는 여성이 너무 궁금했다. 아마 시마무라도 비슷했을 것 같다. 시마무리가 요코를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해했고 매력적으로 느꼈기에 내게도 요코가 궁금한 존재로 자리매김한 걸 거다. 핫초코를 손에 쥐고 하늘을 날며, 마음 편히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니 한국을 떠나면서 든 복잡 미묘한 감정이 잔잔해지는 느낌이었다. 공허와 허무를 다루는 작가의 글을 계속 읽다 보니, 역설적으로 마음을 좀 가볍게 먹고 그냥 걸어봐도 좋겠다는 감상이 있었다.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정말 그 유명한 첫 두 문장을 인용해서 나름의 문장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로건 공항의 긴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리고 글을 쓰는 시점에는 날씨가 많이 나아졌지만, 지난 보름간의 보스턴은 정말 설국이었다. 하루키 작가처럼 나도 꾸준히 집 밖으로 나가 찰스강을 달려야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날씨가 허락하지를 않았다. 케임브리지를 살짝 미워하게 될 정도였다. 비슷한 기분은 22년 겨울 런던 킹스크로스에서 살 때 느껴봤다. 정말 하루 종일 비가 오고 해를 단 1분도 보지 못한 날도 잦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보다는 눈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 장점도 있었다. 이불에 폭 파고들어 귤껍질을 까면서 책과 함께 주말을 보내기에는 최고의 날씨였다.


더 바빠지기 전에 주말을 껴서 뉴욕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친구와 차를 빌려서 갔기 때문에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오는 길에는 암트랙을 타고 오면서 책을 읽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포트리에서 지내면서 뉴욕을 여행하는 일은 꽤 품이 드는 일이다. 아무리 품이 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맨해튼에 숙소를 턱 잡을 경제력은 아직 내게는 없다. 젊음을 무기로 매일 최소 2시간씩을 158번 버스에서 보내면서 꾸역꾸역 뉴저지와 맨해튼을 오가며 여행한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주로 의미 없이 인스타를 보거나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며 창밖 구경을 했다. 창밖 구경도 사실 재미난 게, 맨해튼은 뉴저지에서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버스에서 가방 속에 챙겨간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첫 두 단락만 읽었는데도 너무 흥미로워서 아마 빠른 시일 내에 다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삐딱선을 탄 주인공들이 내뱉는 독백과 속마음이 나는 너무 좋다. 초등학생 때는 이런 류의 소설과 좀 비슷하면서 가벼운 느낌인 만화책 <윔피키드> 시리즈에 완전히 빠져서 그레그 헤플리가 된 것 같이 빙의해서 학교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같이 몰려다니던 친구 녀석이 롤리 제퍼슨이랑 너무 닮아서 더 그렇게 유치하게 '치즈 터치' 같은 유치한 놀이를 따라 하곤 했다. 삐딱하게 생각하고 삐딱하게 말하면 멋있는 줄 아는 전형적인 십 대 사춘기 청소년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더 담백하게, 그냥 해야 할 말만 군더더기 없이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십 대 사춘기 청년이라고 하면 될까?


유럽에나 미국에나 내가 되게 좋아하는 '해피아워'라는 문화가 있다. 어디든 대체로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오전에 일찍 집을 나서면 서너 시쯤 되면 다리가 아파 어디엔가 앉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주로 대학가 근처의 Joe's Coffee 같은 데 들어가서 시간을 축내곤 하는데, 이번에는 대뜸 눈에 보이는 바에 들어갔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 근처인 만큼 뭐 대단하게 고급스러운 그런 바는 아니었고, 흔한 대학가 근처의 음악 좀 잘 틀어주는 바였다.


앉자마자 해피아워 적용되는 위스키 한 잔을 주문했다, 물론 온 더락으로. 사실 낮술을 선호한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 이 날은 저녁에 대면으로는 처음으로 공모전 팀원들을 만나는 날이었는데 낯을 많이 가릴 것 같아 한 잔 미리 마시고 가려는 목적이 컸다. 아무튼 얼음이 조금씩 녹을 때마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재밌게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그러다가 약속 시간이 얼추 다가와서 자리를 나섰다. 가끔은 카페라든가 바라든가 집 밖의 공간에서 커피나 술을 한 잔 곁들이면서 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강 3주 차, 그럴 여유가 주말에 과연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선은 여유가 없지만 이 글은 더 늦기 전에 발간을 해두고 싶어서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오늘도 먼저 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