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축을 찾기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열하루의 기록 [5]
"나는 처음부터 믿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 날의 경험은 내 생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누가 한 말이냐고 묻는다면 다음 문단의 내가 한 말이라고 뻔뻔하게 답할 것이다.
5일 차의 하루는 열하루 가운데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가장 진한 여운이 남은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상세히, 최선을 다하여 그날 느낀 모든 감정을 글로 옮겨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순례자의 길 열하루를 등산에 비유하자면, 다섯째 날은 가장 큰 돌길을 지나 산 정상에 다다른 그런 하루였다. 그 과정에서 정말 따뜻한 천사를 만나게 해 주셨다. 순례자의 길 후기를 읽다 보면, 국적 혹은 인종과 관계없이 신이 잠깐 곁에 머물다 간 듯한 성스러운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나는 처음부터 믿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 날의 경험은 내 생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5일 차 글을 발간하기까지 한 달이나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핑계를 대자면 한국에서 뉴욕에 있는 분들과 원격으로 공모전을 마무리 짓고, 잠시 조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에 나흘간 다녀온 뒤, 곧바로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오느라 바빴다. 어떻게 보면 미뤄진 것이 좋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좋아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도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에서 여행을 마친 뒤 한 두 달 정도 흐른 뒤에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밝힌 바 있다. 나도 개강을 하고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온 이 시점에, 그저 묵묵히 걷던 작년 크리스마스이브를 회상하는 그 자체로 평온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Day 5 메모장에 남겨 둔 짤막한 메모들을 먼저 다음 문단에 옮겨두고, 시간대 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줄글로 마저 풀어보기로 한다.
"손톱과 발톱, 수염. 깔끔 떨지 않기, 유난 떨지 않기"
"Caminha에서 천사를 만남. 오늘 밤 묵을 곳을 제공한 이분이 내게는 마리아로 보인다."
"손톱과 발톱, 수염. 깔끔 떨지 않기, 유난 떨지 않기"
순례자의 길을 걷기로 하면서 평소 깔끔 떠는 성격을 좀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열하루 동안 면도를 하지 않고, 손톱과 발톱도 자라게끔 그 상태 그대로 두기로 했다. 평상시에 나흘 간격으로 손톱의 흰 부분을 모조리 잘라내고 큐티클을 제거할 만큼 깔끔을 떠는 나로서는 정말 큰 도전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행 이튿날쯤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진 형과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나의 지저분한(?) 다짐을 밝혔더니, 형이 마치 '기생충'의 송강호가 최우식에게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하며 바라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본인도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래서인지 나흘차부터 형의 영상 속 우리의 몰골이 점점 더 수척해진 것 같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거의 2주 만에 면도를 하고 손톱과 발톱을 정리했을 때 그 기분은 정말 끝내주긴 했다.) 그렇게 손톱과 발톱을 깎지 않은 채 또 다른 하루를 맞이했다.
이 날 첫 사진은 Afife 마을을 떠나면서 찍은 마을의 한 작은 성당의 사진이었다. 당시 시간 오전 6시 54분, 전날 숙소의 여파로 인해 정말 이른 시간에 준비도 대충 하고 얼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불개미떼로부터 도망치듯 출발했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듯하다.
왼쪽의 사진이 밝기 조절을 하나도 하지 않은 사진이고, 오른쪽의 사진은 아이폰의 자동 밝기 조절을 사용한 것이다. 실제 육안으로는 왼쪽의 사진과 다를 것 하나 없이 정말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인지라 아무도 길에 없었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시간쯤 걸었나, 고속도로가 등장했는데 고속도로에는 아침 일찍부터 차가 좀 다녔다. 쌩~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한두 대씩 지나가는데 너무 어두워서 자칫하면 로드킬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서 팔을 번쩍 든 채로 걸었다.
오전 7시 반쯤 형이 나를 찍은 영상을 다시 재생해 봤더니 내가 "오늘 진짜 춥네요, 새벽이라 그런가? 정신력으로 걷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런 말 했다는 건 당연히 기억도 안 나고, 그저 오전 7시 반에는 대략 이 정도 해가 뜬 상태였구나 하면서 시간 순서대로 당시를 회상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형이 내 글을 꼬박꼬박 챙겨 읽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형이 촬영한 수백 개의 짤막한 영상들은 과연 언제쯤 이 세상에 공개될지 궁금하다. 형의 어드바이저가 된 것 마냥 조금 더 형에게 재촉을 해야 할 듯하다.
아침 8시 30분, Ancora라는 마을까지 걸어왔고 그 마을에서 기적적으로 문을 연 하나뿐인 카페를 발견했다. (이런 문장을 구사할 때면 마을에 카페는 여럿이나 문을 연 카페가 하나뿐이었다는 건지, 마을에 카페 자체가 하나뿐이고 그 카페가 문을 열었다는 건지 중의적으로 읽힌다. 지난 1일 차부터 4일 차까지의 글은 문장을 한두 번씩 다시 읽으면서 표현을 고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러다가는 정말 올해 안에 마무리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처음 적는 문장 그대로 검수 없이 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참고로 여기서는 전자를 말하고 싶었다.)
아무튼 이브에도 문을 열어준 감사한 카페 덕에, 맛있는 크루아상과 따뜻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추위에 잔뜩 언 몸을 녹일 수 있었다. 형이 카페에서도 영상을 자주 찍어줬는데, 아침에 찍어준 영상들을 보면 내가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매일 하품을 하고 있다. 저 때까지만 해도 커피에 설탕을 따로 넣지 않고 쓴 맛 그대로 마셨는데, 어느 날부터는 나도 모르게 주는 설탕은 다 때려 넣고 마실 정도로 피로가 점점 누적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커피와 빵으로 체력을 충전하고는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Ancora 도심에서 얼마 안 가 Vila Praia de Ancora라는 부산 해운대 분위기의 해변가가 등장했다. 줄을 서서 나란히 걸어가는 염소 떼와 양 떼도 보고, 정말 아름다운 지평선과 낮게 깔린 구름도 보면서 황홀하다는 단어만 연신 내뱉으면서 걸었다. 이때쯤 10km를 돌파하고 기념 영상을 형과 함께 찍으면서 걸었는데 그 영상을 다시 틀어보니 바람 부는 소리에 대사가 씹힐 정도다. 내가 "날씨 너무 쨍하고 공기도 너무 좋은데, 약간 추운 것 같아. 머리가 아주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했더니 형이 옆에서 "어차피 우리 안 씻었잖아. 괜찮아~"했다. 첫날 영상에선 어색해서 서로 파이팅만 외치던 사이였는데, 나중에는 걷는 내내 인생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등 정말 오만 수다를 떨면서 걸었다. 걷는 내내 형한테 줄리아 로버츠나 클레어 폴라니 같이 활짝 웃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만 열 번 가까이 얘기한 것 같다.
오전 내내 한참을 걷고 Cristelo라는 동네에 도달했을 때, 정말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면서 낮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4시간쯤 걷고 km수로는 약 14km 정도 걸은 때였다. 때마침 성인 남성 한 명 눕기 충분한 2m 정도 길이의 돌 벤치도 딱 두 개가 있길래 형한테 "우리 야외에서 낮잠 한 번 자고 갈래?" 물었더니 형이 너무 좋다고 하길래 잠깐 누워서 길바닥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30분 정도 정말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깊은 단잠을 청하고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슬슬 신발의 매듭을 다시 조이고 천천히 다시 걸을 채비를 하고 형을 깨우러 갔다.
형은 나보다도 더 깊이 잠에 든 모양이었다. 사진을 찍은 정도의 거리로 가까이 가서 불렀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뭐든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자는, 같이 여행 다니기 좋은 형이다. (아시안 음식을 유독 그리워하고 잘 때 코를 좀 골긴 하지만 말이다.) 사진 속 나무 스틱은 형이 며칠간의 비로 인해 쓰러진 거목의 가지 중 하나를 뜯어 직접 만들고 다닌 스틱이다. 형은 일어나자마자 세상 맛있는 낮잠이었다며, 이 정도 몸 상태라면 지금부터 다시 30km를 걸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 날 저녁에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ㅎㅎ)
낮잠을 자고 나서 우리는 정말 빠른 속도로 걸어 Caminha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이 Caminha라는 동네는 내가 열하루 동안 들른 마을 가운데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는 단 세 마을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두 동네는 각각 전날 공포의 알베르게와 불개미떼를 선물한 Afife, 그리고 스페인으로 횡단하는 내륙길을 거쳐 등장하는 Tui다.) 카민 하는 내게 애증의 마을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차차 서술하겠다.
Caminha는 다행히 생각보다 큰 마을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불구하고 연 식당도 꽤 다양했고, 마을 사람들도 연말 분위기를 한껏 내며 햇살을 쬐러 광장에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도 광장 한가운데 있는 햄버거 가게에 자리를 잡고 콥샐러드를 비롯해서 각자 순례자의 식사에 걸맞은 단백질 위주의 든든한 메뉴를 주문해서 배불리 먹었다. 반가운 상점도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약국이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약국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한국에서는 1년에 약국을 두 번 갈까 말까 한데, 열하루 동안만 약국에 세 번 들렀다. 사실 약국에는 다 떨어진 파스를 구입하기 위해 방문한 건데, 약국 한가운데 큰 우산꽂이 같은 데에 스틱(목발)이 종류별로 가득 꽂혀 있었다.
정확히 얼만지 이제는 흐릿한데, 20유로 정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발목이 아픈데, 나 자신을 위한 2025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3만 원 좀 넘는 스틱 한 자루는 사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충동 구입을 했다. 이 당시 한 해를 일주일 남겨 놓은 시점이었는데, 이 날 세 시간쯤 더 걷고 난 뒤 확신했다. 이 스틱이 2025년 올해의 소비 아이템에 해당한다는 걸 말이다. 정말 너무 잘 샀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내 글만을 기반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획하는 무모한 독자가 있다면 스틱을 구비하길 바란다. 그렇게 나는 스틱을 구입했고, 형은 형 자신을 위해 발바닥 부분이 도톰한 등산용 깔창을 구입했다. 각자 만족스러운 크리스마스 쇼핑을 마치고 다시 걷기 시작한 게 오후 2시쯤이었다.
확실히 둘 다 스틱을 짚고 걸으면서 걷는 속도가 확연히 빨라졌다. 오후 4시 반까지 쭉쭉 걸으면서 어느덧 Seixas라는 동네까지 진입했는데, 이때 찍은 영상이 참 어처구니가 없다. 당시 체력으로는 최대 1시간 반 정도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근방의 호텔, 모텔, 알베르게를 전부 걸어 숙소를 알아보았는데 이브날 문을 연다고 나온 숙소는 4성급 호텔 단 하나였다. 호텔에는 무려 스파도 있었다. 형이랑 전날 불개미 알베르게에 대한 자체적인 보상이라도 제공하겠다는 듯이 같은 마음을 먹고 그곳에서 묵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순례자의 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4성급 호텔과 스파였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듯이 우리도 비슷한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영상 속 형이랑 나는 거의 패트와 매트같이 미소 지으며 "오늘은 문 연 숙소가 4성급 호텔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40분만 더 걷고 호텔에서 스파 하면서 좀 휴양하고 계획도 다시 세우고..." 하고 말했다.
4성급 호텔답게 정말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고급 차를 타고 오라는 듯이 말이다. 스틱으로 땅을 탕탕 튕겨가면서 40분을 정말 최선을 다해 걸었다. 걷는 동안 스파하는 상상도 하고, 형이랑 감자튀김 같은 거 룸서비스로 시켜놓고 남은 일정 계획 세우는 그런 상상도 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한 순간 정말 망연자실했다. 드넓은 입구에 전부 쇠창살이 쳐져 있었다. 이 호텔마저도 당일 휴무였던 것이다. 오후 5시 34분이었다. 30분 후면 해가 완전히 지고 정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형이 현재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내게 현재 상황에 대해 한마디 하라고 카메라를 비추었는데, "형...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하면서 카메라 끄고 빨리 대안이나 찾자고 했다. 더 두려웠던 것은 형도 나도 이제 폰 배터리가 15% 안쪽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지도조차 보지 못하는 상태로 꼼짝없이 호텔 앞 길바닥에 갇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형이랑 나랑 각각 우버와 볼트를 세 번씩 불렀고, 세 번씩 '응답 없음에 의한 카드 선결제 환불'을 당했다. 우리가 절대 우버를 타지 않겠다는 신념을 꺾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숙소가 하나라도 있는 동네로 데려다주겠다는 이동수단은 하나도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6시였다. 미국에서 땡스기빙데이 저녁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칠면조 요리를 먹으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듯,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날 그렇게 가족과의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프랜차이즈 숙박 업소 하나쯤은 영업을 할 줄 알았다.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형은 최악의 경우엔 저 호텔 담을 넘어서 그냥 안에 들어가서 하루 침낭 덮고 자자는 소리를 하고, 나는 길 가는 사람이면 아무나 붙잡아서 재워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각자의 생존을 위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던 때였다. 귀여운 갈색 강아지 한 마리를 산책시키며 한 멋지고 우아한 백발에 멋진 비니를 둘러 쓴 중년 아저씨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언덕을 향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말을 걸었다. 이 근처에 문 연 숙소가 있는지 아시냐고. 아저씨께서는 전부 다 닫았을 거라고, 잠시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망설이더니 이내 발길을 왼쪽 언덕을 향해 옮기셨다. 잠깐이라도 멈춰서 함께 고민해 준 아저씨께 마치 '나 홀로 집에'의 케빈이 비둘기 아주머니한테 말하듯, 처량한 목소리로 "Merry Chirstmas Eve"하고 인사했다.
15분쯤 흘렀나, 우리는 그 상태 그대로였다. 형은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정말로 담을 넘을 궁리를 하며 호텔 벽 주위를 돌아보러 갔고(설령 형이 정말 담을 넘을 수 있겠다고 한들, 나는 차라리 길에서 자는 편이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설득하려 했다), 나는 Open Now에 아무런 숙소도 뜨지 않는 구글맵만 하염없이 돌려보고는 오지 않는 우버를 호출하고 있었다.
그때 아까 그 멋쟁이 아저씨와 함께, 정말 너~무 천사 같은 웃는 상의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나를 향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국적과 인종을 떠나서도 이 아주머니께서 착하고 따뜻한 분이라는 것은 그녀의 반달 같은 눈썹과 깊은 눈망울만 보고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먼저 아저씨께서 "아직도 머물 곳을 구하지 못했니?"하고 영어로 말을 거셨다. "네... 정말 큰 일이네요." 하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이미 오는 길에 우리의 사정에 대해 아저씨로부터 들으신 모양이었다. 머뭇머뭇하시더니 이내 내게 쑥스러운 듯이 미소 지으며 말을 꺼내셨다.
"그... 사실 우리가 차로 10분 거리에 큰 에어비앤비를 하는데 말이야. 11월에 마지막 손님 받고 연말은 비수기라서 예약을 막아놨단다. 너네 괜찮으면 급한 대로 오늘 밤 거기서 머물겠니?"
그 말씀을 듣는데, '정말 천사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이 땅에 내려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너무 뭉클하기도 했고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기도 했다.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과 긴장이 단번에 풀리면서 다리가 풀렸다.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특별한 날에,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한창 준비할 시간인 오후 6시에 길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동양인 대학원생 둘(둘 다 호감상이긴 해~)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너무 감사했다.
언어와 몸짓을 총 동원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감사 인사를 하고, 숙소비는 너네 원래 가려고 했던 숙소값만큼만 달라고 하셨는데, 감사한 마음에 바로 가진 모든 현금인 100유로를 내어드렸다. 원래 머물려고 했던 4성급 호텔에 비하면 저렴할뿐더러, 사실 이 날이야말로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오로지 은혜로운 마음뿐이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께서 에어비앤비까지 차로 태워다 주시기로 했다. 일단 나였으면 우리 같은 몰골을 한 두 외국인을 차에 절대 안 태웠을 것 같다. 게다가 이 날 아침에 불개미와 냉수 이슈로 안 씻고 나와서 아마 냄새도 많이 났을 것 같아 아직도 좀 죄송스럽다.
차로 10분 거리라던 에어비앤비는, 우리가 오후 2시부터 다시 열심히 걷기 시작했던 그 출발점인 익숙한 그 이름, Caminha에 있었다. 4시간 가까이 열심히 걸어온 거리가 인간이 만든 최고의 이동수단인 자동차에 의해 '딸깍'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아저씨의 차로 Caminha까지 이동하는 중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부는 모두 포르투갈 분들이셨고, 두 분이 영어로 유창하게 우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비결은 아주머니께서 포르투갈 영어 교사 셨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유럽 시골의 외딴 언덕길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청한 상대가 영어 선생님일까? 이 모든 게 우연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리의 배경을 궁금해하셔서 둘 모두 각자 미국과 영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학교와 전공도 여쭤보셔서 자연스럽게 최근 내가 재학 중인 MIT에서 일어난 포르투갈인 교수의 총격 사망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케임브리지에 사는 나한테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포르투갈 국민들에게도 정말 비통하고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숙소는 내가 여태껏 머물렀던 유럽 가정집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돌바닥이라서 한기가 많이 올라오긴 했지만, 아주머니께서 라디에이터를 준비해 주신 덕에 방은 꽤나 따뜻했다. 손빨래한 양말이 어느 정도(80% 수준으로 마르면 감사하고 신는 버릇이 생겼다.) 마르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열기와 건조함이었다. 11월 말부터 한 달 넘게 비워뒀던 집 치고는 정말 너무 깨끗하고 깔끔했다. 우리가 머물 방에는 그간 빨아서 개켜놓은 모든 여벌 침대 시트와 베갯잇이 쫙 쌓여 있었다. 우리는 이 날 에어비앤비 게스트들 가운데 역대 최초로 에어비앤비 호스트들과 함께 침대 시트를 끼우고 베갯잇을 끼운 사람이 되었다. 아저씨께서 오른쪽 침대의 커버를 거꾸로 집어 드셨다가 아주머니께 반대로 끼우라고 혼이 나셨다. 형이랑 나랑 아저씨랑 셋이서, 남자는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평생을 여자한테 배우고 혼나면서 사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 날 한 번 더 뭉클했던 것은 아주머니께서 머무는 동안 혹시 모를 상황이 있다면, 그런 상황이 없더라도 앞으로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자고, 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하면서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나도 또 쓸데없을 정도로 정이 많은 사람으로서 마치 아들 걱정하는 엄마한테 보고하듯이 "저희 따뜻한 물로 잘 씻고, 간단히 요기하고 이제 자려고요. 다시 한번 재워주셔서 너무 감사해요."하고 왓츠앱 메시지를 보냈다.
아주머니께서 장문의 답장을 해주셨는데, "We almost went to fetch you to have dinner with us and I'm sorry we didn't."라는 문장에서 또 한 번 뭉클했다. 이 문장이 마치 오지랖과 걱정이 상당한 우리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분명 우리가 크리스마스이브날 머물 곳은 해결했다고 쳐도, '이 녀석들이 이브날 저녁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는 있을까?' 하면서 걱정하셨던 것 같다. 걱정에서 나아가, 가족들의 식사 자리에 다시 부를까 고민하다가 아저씨 혹은 따님께 한소리 들으셨을 수도 있다. 그냥 너무 감사했고 감동했다.
보통 엄마의 걱정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이 날 우리는 결국 아주머니의 걱정대로 저녁을 먹을 곳을 찾지 못했고 굶어야 했다. 너무 처량하게 생각하실까 봐 "간단히 요기하고" 잔다고 착한 거짓말을 좀 섞었는데, 사진 속 빵쪼가리와 비스킷 몇 조각이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심지어 사진 속 빵 네 조각도 아주머니께서 밤에 출출하면 더 먹으라고 놓고 가신 건데, 이것마저 없었으면 아사할 뻔했다. 형이랑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른 네 종류의 빵을 어떻게 나눠먹을지 고민하다가, 나름 Master of Finance 학생으로서 경제학적으로 공평한 방법을 제안했다.
"형, 내가 빵을 자를 테니 형이 빵을 골라." 그렇게 공평하게 자르고 분배된 빵 네 조각과 뜨거운 물에 우린 티 두 잔으로 평생 기억할만한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을 해결했다. 그간 내가 쓴 글을 쭉 읽어온 독자라면 눈치챘을 수도 있는데, 드디어 오늘 이스터에그를 하나 떡밥 회수하자면 이 티백들이 바로 아조레스 에어라인에서 승무원께서 비행 로그북에 붙여준 아조레스 산 티백이었다. 둘 다 홍차였는데, 두 번 세 번 우려 마실 정도로 맛이 좋았다. 뭔가 수첩 사이에 붙은 티백을 뜯어서 실제로 마시니까 굉장히 아날로그적이면서도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무는 숙소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티 한잔까지도 내 주위의 따뜻한 마음과 손길이 닿아 있다고 생각을 하니 더더욱 감흥이 컸다.
보통은 어디에서 머물든 간에 머물고 나서 편지나 카드를 남기고 가는데, 이 날은 더 많이 걸어야 해서 일찍 출발하게 되면서 편지를 남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걷는 길에 AI로 어제 찍은 두 부부와 귀여운 강아지의 뒷모습을 넣은 연하장을 만들어서 내 마음을 전했다.
나는 글로벌 친구들이 내게 해주는 말 중에서 “My home is your home."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실제로 내가 파리에 갑작스럽게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을 때 아셀이 잠깐의 고민도 없이 집 키를 내어주는 등 마음 따뜻해지는 경험도 자주 했다. 그래서 나도 Fernanda 아주머니께 “My home is your home, whether in Korea or in Boston."이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살면서 맞이한 성탄절이 2X번, 일평생 받은 선물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평생 기억할 만한 성탄 전야가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