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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Nov 01. 2015

영화 <빠삐용>

프랭클린 새프너 감독, 스티브 맥퀸, 더스틴 호프만 주연. 1973년 작. 2015년 10월 7일 레드 그래나이트 영화사(Red Granite Pictures)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 하겠다고 발표해 다시 화제를 모았다 (기사).


첫 극장 경험

1974년, 당시 극장가 최고의 대목이었던 추석 시즌. 그 이름도 유명한 명보극장에선 <빠삐용>이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었다. 그때 이 극장을 기어 다니던 두 살배기 아기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접니다. ㅠㅠ


신혼이셨던 부모님께서 나를 데리고 당시 인기 절정의 영화 <빠삐용>을 보러 오신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민폐가 아니었나 싶다.^^


나의 첫 극장의 경험이 내 무의식 한 구석에 콕 박혀 버린 것일까? 십대 이후 <빠삐용>은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까지 열 번쯤은 본 것 같다. 그러나 최근 5-6년 동안은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비행기에서 <빠삐용>을 다시 감상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봤더니 예전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래서 이번엔 그간 알게된 잡식과 감상을 정리해 언젠가는 한번 나눠보고 싶었던 <빠삐용>에 대한 얘기를 적는다.


원작

원작 <빠삐용>의 초판 표지

1969년 발표된 앙리 샤리에르(Henri Charrière; 1906–1973)의 동명 자전적 소설이 원작. 원작자인 앙리 샤리에르는 <빠삐용>의 내용이 자신이 실제로 겪은 사실 그대로라고 주장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앙리 샤리에르가 악마의 섬에 수감된 적이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프렌치 기아나의 허물어진 감옥을 다시 방문한 앙리 샤리에르

후에 샤를 브루니에(Charles Brunier; 1901–2007)가 빠삐용의 실제 주인공은 자신이며 앙리가 자신의 얘기를 훔쳤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샤를 브루니에는 악마의 섬에 수감되었던 기록과 함께 실제로 가슴에 나비문신이 있었다 (샤를 브루니에 위키피디아 페이지 참조).

샤를 브루니에

앙리 샤리에르의 <빠삐용>보다 먼저 출판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또 다른 악마의 섬 탈출기가 있다. 1938년에 출판된 르네 벨베누아 (René Belbenoît; 1899–1959)의 <Dry Guillotine>이 그것이다. 르네 벨베누아는 <Dry Guillotine>이 유명해 지자 미국 이민당국의 조사를 받고 실제로 악마의 섬을 탈출해 미국으로 불법 입국한 것이 들통 나 미국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르네 벨베누아와 <Dry Guillotine>의 표지).



<빠삐용>은 <Dry Guillotine>의 성공을 알고 있던 앙리 샤리에르가 자신의 경험과 다른 죄수들의 경험을 각색해 만든 창작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빠삐용>은 완벽한 허구도 완벽한 사실도 아니다.


그러나 원작의 사실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영화 <빠삐용>은 영화 자체로 음미할 가치가 있다.


영화 <빠삐용>의 매력

영화 <빠삐용>은 1974년 국내 개봉 당시 약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에 개봉돼 46만 관객을 끌어 모았던 <벤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당시로써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게다가 <빠삐용>이 최초 개봉된지 16년 후인 1990년에 이례적으로 국내 주요 개봉관에서 재개봉되기도 했다. 발표된지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빠삐용>은 우리나라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  


그 비결은 뭘까?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의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가 물론  한몫한다. 그러나 <빠삐용>에는 우리에게 어필하는 또 다른 깊은 매력이 분명히 있다.


플롯

프렌치 기아나는 남미 적도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다.

살인 누명을 쓴 금고 털이범 빠삐용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국채 위조범 루이 드가와 함께 프렌치 기아나로 향하는 죄수 수송선에 탑승한다. 프렌치 기아나는 남미의 프랑스 식민지로 프렌치 기아나행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한 포기와 영원한 격리를 의미한다. '빠삐용'은 불어로 '나비'라는 뜻. 빠삐용의 나비문신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루이 드가가 몸속에 많은 돈을 숨겨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수송선의 다른 죄수들은 드가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드가는 빠삐용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고 빠삐용은 그 대가로 섬에 도착하는 대로 탈출에 필요한 배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시작된 두 젊은 죄수들의 만남.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이들의 만남은 탈출 시도, 검거, 독방 수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질긴 인연을 이어간다.

원작에 따르면 앙리 샤리에르의 수감부터 탈출까지는 11년이 걸린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정확한 햇수를 특정하지 않고 후반부엔 빠삐용을 백발로 등장시켜 11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둘은 결국 섬 자체가 감옥인 '악마의 섬(Devil's island)에서 다시 그 기구한 만남을 이어간다. 이 섬엔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의 건국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삼색기가 펄럭인다.

깎아지른 절벽과 거센 파도로 둘러 싸인 이 섬에서 탈출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여기선 별다른 감시도 없다. 그런데도 빠삐용은 친구 드가를 뒤로 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바다로 몸을 던진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이 장면은 소름 돋는 압권. 해류를 따라 멀어지는 빠삐용을 바라보다 다시 텃밭이 있는 거처의 일상으로 말없이 발길을 돌리는 루이 드가. 정말 한 컷도 더 빼거나 더 하고 싶지 않은 명연기, 명장면이다.


빠삐용이 던지는 질문

영화 <빠삐용>은 2시간 30분의 러닝타임 내내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만든 제도의 비인간성에 대해 냉혹한 질문을 줄기차게 던진다.  


왜 빠삐용은 절벽에서 뛰어내렸을까? 악마의 섬에서는 노역도 없고 감시도 없다. 텃밭도 가꾸고 가축도 키울 수 있다. 친구 드가네 집에 언제든지 놀러 갈 수도 있다. 이미 탈출을 포기한지 오래인 드가는 벌써 가축들 하나 하나에게 이름까지 지어주고 일상의 재미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기존 수감생활과 비교하면 별다른 불편 없는 환경. 이들의 생활 수준은 이 섬에 거주하는 프랑스 중사와 비교해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빠삐용은 끝내 죽음을 무릅쓰고 절벽에서 망망대해를 향해 몸을 던진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 였을까? 인신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악마의 섬에서 드가와 빠삐용은 이미 충분히 자유롭다. 더구나  탈출해서 뭘 하려느냐는 질문에 빠삐용은 아직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고 답한다. 영화 내내 빠삐용의 입으로 자유가 얼마나 숭고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말 한적은 한 번도 없다.


빠삐용이 추구한 것, 그로 하여금 절벽에서 몸을 던지게 한 것이 자유 그 자체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하다.

그러면 무엇이 빠삐용으로 하여금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도록 했을까? 도데체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인가?


빠삐용은 밟으면 그대로 밟히고 억누르면 그대로 눌려있어야 하는, 그야말로 나비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죄수다. 이와 대비되는 프렌치 기아나 감옥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간악하며 무시무시할 정도로 막강한 '제도(institution)'라는 공권력이다. 이 공권력은 이에 굴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달콤하다.  

<빠삐용>에 등장하는 갖가지 형벌과 회유는 모두 공권력이 구성원을  길들이는 데 사용하는 수단이다. 형벌이 가혹해질수록 회유는 손쉬워진다. 회유는 보상을 전제로 하는데 형벌이 계속되면 형벌을 줄이는 것 만으로도 쉽게 보상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선 누구나 잔인한 형벌을 피하고 달콤한 일상의 행복을 찾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드가의 대사,

Someone once said that the temptation resisted is the true measure of character.


즉, "얼마나 유혹을 견뎌냈는지가 사람 됨됨이의 진정한 척도라고 누군가 말했지.”는 이 영화 전반에 걸쳐 그 의미가 깊다.

빠삐용은 이러한 유혹에도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빠삐용의 저항정신은 밟으면 밟을수록 더욱 굳건해진다. 감옥과 형벌이 그의 몸은 억압할 수 있었지만 그의 정신마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악마의 섬에서의 비교적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은 이미 드가를 완벽하게 길들였다. 그러나 빠삐용은 다르다. 그는 편안한 악마의 섬에서의 생활이 제공하는 '길들여짐'의 유혹을 거부한다.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빠삐용은 형벌이나 회유에도 불구하고 (또는 형벌이나 회유 때문에 오히려 더) 길들여질 수 없는 저항 의지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빠삐용이 추구하던 것은 자유 그 자체 보다는 비인간적인 제도라는 권력, 또 그 권력이 제공하는 달콤한 길들이기의 유혹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빠삐용에게 길들여진 삶을 사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 없다.


교도관과 죄수

독방 배식통에 코코넛을 몰래 넣어준 것이 누구인지를 자백하지 않아 배식도 반으로 줄고 빛도 차단된 빠삐용. 비타민 부족으로 이가 빠져버리자 직관적으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빠삐용은 루이 드가가 코코넛을 넣어 주었다는 것을 자백하기로 결심하고 교도관을 부른다. 그러나 찾아 온 것은 교도관이 아닌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검사. 그것도 교도관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찾아온다.

여기서 빠삐용은 알아챈다. 빠삐용이 상대하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라 제도라는 권력을 등지고 제도를 집행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에고(ego)라는 것을.


영화를 보다보면 검사와 교도관들이 죄수를에게 인간적인 모욕을 주고 수치심을 유발하게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법의 집행자들은 죄수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것을 죄수들에게, 또 자신들에게 계속 확인시킨다. 그래야만 죄수들의 마음속에서 자기네들도 뭔가 할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의 싹이 자라는 것을 애초부터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인신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곳 만리타향 프렌치 기아나에 갖혀지내는 신세는 죄수들이나 제도를 집행하는 이들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는 프렌치 기아나에서 법을 집행하는 이들도 공공연하게 부정, 탈법을 저지른다. 이들은 자신들도 사실은 '죄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죄수들의 차이는 사실 이들이 등에 업고있는 권력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더 가혹하게죄수들을 학대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죄수들을 굴복시킴으로 자신들과 죄수들간의 차이점을 재확인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어떠한 도전이나 위협도 인정할 수가 없다. 권력의 부정은 그들이 그토록 더럽고 추악하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던 죄수들과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스스로 자부했던 자신들이 사실은 별로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한 권력일수록 더 권위적이고 혹독하게 피지배계층을 다루는 것이다.


빠삐용이 간수를 부르자 검사는 '그러면 그렇지'하면서 자신의 권력 아래 굴복하는 빠삐용을 직접 목격하고 싶어 혼자 찾아온다. 죄수는 나약하고 비루한 존재라는 것, 유혹이라는 덫이 아직 잘 작동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와 우월성이 아직 문제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 검사의 얼굴을 본 빠삐용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루이 드가가 코코넛을 넣어 주었다고 자백하는 대신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누가 코코넛을 넣어 주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둘러댄다.


굴복하지 않는 의지

요컨대 빠삐용이 추구했던 탈출의 본질은 자유로운 삶의 추구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프렌치 기아나의 형벌 제도라는 권력에 대한, 그 권력이 줄기차게 뻣치는 달콤한 '길들이기' 유혹에 대한, 또한 이를 등에 업은 인간의 에고에 대한 조건없는 저항이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대사는


This, the infamous penal system of French Guiana did not survive him.


즉, "이 악명 높은 프렌치 기아나의 수감제도는 빠삐용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가 아닐까 한다. 영원할 것같던 무시무시한 권력의 상징, 프렌치 기아나 감옥은 1953년 결국 폐쇄되지만 그토록 잔혹하게 짓밟혔던 힘없는 죄수 앙리 샤리에르는 이보다 20년을 더 살고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프렌치 기아나의 감옥

우리나라에서 유독 인기가 많은 <빠삐용>. 아마도 빠삐용이 보여준 저항정신, 나약한 인간의 결코 나약하지 않은 저항 의지의 승리가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의 억압과 회유를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낸 우리 국민의 정서에 특히 어필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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