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2
1993년 이었던 것 같다. 친구네 아버지께서 창신동 도매시장에 작은 가게를 내셨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단다. 나는 어차피 휴학계를 내고 입영을 기다리던 몸이라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무작정 그리로 출근하기로 했다.
창신동 도매시장은 문구, 완구, 운동용품 도매상이 밀집해 있는 재래시장이다. 서울에 오래 살았어도 이곳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첫 출근을 하고서야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대문에서 신설동 방면으로 조금 걷다 보면 <독일약국>을 끼고 오른쪽으로난 작은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제법 큰 매장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네댓평 남짓한 작은 가게들이다. 그러나 구멍가게라고 얕잡아 봐선 안된다. 이 골목에 입점한 가게라면 매장보다 훨씬 큰 창고를 한 두 개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장엔 견본이나 동네 문구점에서 가져갈 만큼의 물건만 내놓고 큰 거래는 창고에서 직접 물건을 뺀다.
처음 일을 시작해서는 뭘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멀뚱멀뚱 서 있다가 사장님이 뭘 시키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 해 있기 일쑤였다.
첫 출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방에서 꽤 큰 매장을 운영한다는 분이 우리 가게를 들렀다. 우리 사장님은 배달 커피까지 대접해 가면서 열심히 영업을 했다. 싸구려 커피지만 이 동네에서 배달 커피를 얻어먹었으면 일단 뭐라도 사가겠다는 얘기다. 나는 커피 마시는데는 끼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듣다 보니 하필 그 손님이 찾는 물건은 우리 가게엔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이 날 부른다.
창고에서 그 물건 있지? 그것 좀 하나 가져와봐라. 매장에 갖다 놓은 게 벌써 다 빠졌네.
그러더니 나한테 슬쩍 윙크를 하신다. 오메, 이건 뭔 뜻이란 말인가. 뭘 어쩌란 말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눈만 껌뻑 껌뻑하다가
사장님, 그거 우리 가게에 없는 물건인데요.
그랬다. 순간 사장님이 눈을 질끈 감는다. 사장님은 손님이 찾는 물건이 우리 가게에 없는 줄 다 알면서 창고를 핑계로 나에게 옆 가게에서 그 물건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이곳에선 손님이 찾는 물건이 가게에 없더라도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가져와 우리 물건인 것처럼 판다. 이 골목에서는 물건이 실제로 있건 없건 먼저 손님을 잡은 사장에게 거래의 우선권을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일단 거래만 성사되면 웬만한 물건이야 나중에 어디서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경쟁사에서라도 일단 물건을 떼어오고 마진은 나눠갖는다. 한마디로 경쟁과 공생의 공존.
그렇게 몇 주 눈칫밥을 먹으니 나중에는 손님 옷차림, 말투만 봐도 물건을 사러 왔는지, 아니면 구경만 하러 왔는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일하던 가게는 보통 '팬시 용품'이라고 부르는 학생 취향의 문구, 스티커, 열쇠고리,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을 주로 취급했다. 한참 일에 재미를 붙여 장사가 운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를 든 젊은 손님이 찾아왔다. 93년, 그때만 해도 휴대전화가 상당히 비싸고 귀할 때라 휴대전화만 들고 있어도 단박 손님의 구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이 손님은 통이 컸다. 주차장에 대형 탑차를 세워놓았는데 오늘 그걸 다 채워서 공항으로 보낸단다. 나는 대충 어떤 물건을 찾는지 묻고 이것저것 구색을 맞춰 가져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손님 중에도 맞는 사람이 있고 안 맞는 사람이 있다. 이 손님은 나와 잘 맞았는지 보여 주는 물건마다 덥석덥석 뭉텅이 주문을 한다. 사장님도 괜히 끼어들었다가 잘 되고 있는 거래를 망칠까봐 카운터에서 싱글거리며 괜히 딴청을 피우고 계신다.
대박 계약이었다. 나는 주문서를 확인하며 창고에서 물건을 리어카에 실어 손님의 탑차로 옮겼다. 수없이 창고와 주차장을 왔다 갔다 한 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주문받은 물건을 겨우 다 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수증에 도장을 받아 가려는데 이 손님이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한다. 이 손님은 담배도 안 피우는 내게 다짜고짜 담배를 주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이 바닥에서 수고했다는 표현은 대체로 그랬다. 큰 손님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나는 주는 담배를 받아 물고 말없이 겉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너 우리 회사에서 장사 한번 배워볼래?
라고 묻는다. 제법 진지하고 구체적인 제안이었다. 이 손님은 파티에 쓰는 눈꽃 스프레이를 개발해 종잣돈을 모아 친구들과 회사를 차리고 세계 곳곳에 팬시 용품점 매장을 세웠단다. 아프리카에서 우리나라 제품의 인기가 좋아 매장을 늘리고 있는 중이라며 그쪽에서 장사를 배워볼 생각은 없냐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순간 갈등했다. 그때 한창 장사를 배우는데 재미가 붙었던데다가 휴대전화를 허리에 찬 이 형님이 너무나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 가기도 전에 바로 거절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 갈등만 더 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나는 군대도 가야 했거니와 또 다른 목표가 있었다. 그때 그 형님을 따라 아프리카로 갔으면 난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우리 가게 옆엔 노총각 삼 형제와 그들의 노부모가 운영하는 체육사가 있었다. 역기, 아령 같은 여러 가지 운동기구를 파는 작은 가게였는데 손님이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그래도 삼 형제가 모두 성실해 새벽같이 출근해 셔터를 올리고, 부지런히 물건을 진열하고, 쉴 새 없이 물건에 싸인 먼지를 털어냈다. 그 삼 형제는 손님이 없을 때면 매장의 역기와 아령을 들고 열심히 운동을 했는데 다들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사장님은 이 체육사를 보며 은근히 걱정을 하시곤 했다. 노총각 삼 형제가 파리만 날리는 구멍가게에서 하나같이 몸만 열심히 만들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상도 못하던 사건이 벌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1) <아들과 딸>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고두심과 채시라가 훌라후프를 돌린다. (2) 방송이 끝나자 전국에서 이 방송을 본 사람들은 훌라후프를 사려고 동네 문구점으로 몰려든다. (3) 훌라후프가 몇 개 없던 전국의 문구점은 곧 각 지역 도매상에 훌라후프를 주문한다. (4) 훌라후프 재고가 별로 없던 각 지역 도매상은 창신동 도매 골목으로 벌떼처럼 몰려든다. (5) 한가하던 체육사가 갑자기 훌라후프를 사려는 지방 도매상, 지역 문구점 사장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량을 확보하지 못한 사장들은 선금을 챙겨주고 꼭 물건 좀 부탁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훌라후프 대유행의 열기는 한 달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주변 사장들은 이 체육사를 지나며
어이구, 노났네, 노났어!
라며 부러워했다. 요즘 말로 대박 났단 얘기. 대중 매체의 상상을 초월하는 파워, 그리고 준비된 기다림 끝에는 기회가 언젠가 온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창신동 도매 골목엔 타인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시장 상인들만의 세계가 있다. 나름의 불문율과 상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애환이 엉켜있는 이 별세계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무슨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일들이 벌어진다. 공식 판권을 가진 업체의 직원이 판권 없이 물건을 파는 가게에 들이 닥쳐 물건을 죄다 뒤집어놓는다던지, 자기네 단골에 경쟁 다방 커피가 들어갔다고 거리에서 다방 간 이종격투기가 벌어진다던지 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작고 낯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더 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묘하게 닮았다. 단지 여기선 그런 일들이 아무런 가식이나 꾸밈없는 민낯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니 그때 그 작은 세상에서의 아르바이트가 현실 세계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창이 되어 주었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줄넘기나 훌라후프가 유행을 하면 22년 전 그 체육사의 삼 형제 분들이 떠오른다. 다음에 그쪽을 지날 기회가 있으면 한번 들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