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1
나는 아르바이트를 제법 해본 축에 낀다. 한 가지를 오래 한 적은 없었지만 손꼽아 보니 이제까지 해본 아르바이트가 일고여덟 가지는 된다. 그중엔 공문서 번역 같이 고리타분한 일도 있었지만, 창신동 도매 골목에서 리어카를 부리며 뛰어다니던 일처럼 신나는 아르바이트도 있었다. 개중에는 황당한 경험도 없지 않았다. 벌써 이십 년쯤 지난 일들이다. 어찌 됐건 나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대체로 유용했다. 그중 하나가 물 방석에 얽힌 이야기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집에 있자니 뭔가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고 용돈도 좀 벌어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마침 신문에 경험 필요 없이 반나절만 일하면 하루 일당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토막광고가 눈에 띈다. 이 광고를 보고 사촌동생을 꼬드겨 종로 어디에 있는 허름한 사무실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참 겁이 없었나 보다.
도착하니 사무실엔 두루마리 휴지부터, 장난감, 생활용품까지 별의별 제품이 다 있었다. 이곳의 시스템은 이렇다. 먼저 직원의 설명을 듣는다. 직원은 이들 제품이 얼마나 고급지며 가격은 또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저렴한지를 침이 마르도록 설명해 준다 (이것을 여기선 '교육'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이 직원은 몇 푼이라도 벌어 보겠다고 새벽밥 먹고 나온 우리들에게 이 물건들을 판다. 절대 안 살 것 같지만 직원의 말을 다 듣고 나면 아무리 허접한 물건이라도 무슨 마술에 걸린 것처럼 돈을 빌려서라도 사게 된다. 직원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워낙 싸게 떼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말만 잘 하면 나가서 두세배 받고 다시 파는 것은 식은 죽먹기라고 한다. 돈 벌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진작 할 걸. 쉽게 말해 방문판매였다.
사촌 동생과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다. 두루마리 휴지는 너무 부피가 커서 많이 못 가져가니까 부피가 작고 단가가 높은 것을 사기로. 그런 우리에겐 '물 방석'이란 제품이 딱이었다. 물 방석이 뭔가? 방석 모양으로 만든 납작한 비닐 튜브에 공기 대신 수도꼭지를 이용해 찬 물을 넣고 앉으면 엉덩이가 시원 해지는 당시 최신 아이디어 상품이다 (표지 사진은 내가 대충 비슷하게 그려 넣은 것이다). 직원의 말로는 무더운 여름 오랫동안 운전을 해야 하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에게 꼭 필요한 제품인 데다가 오늘 처음 나온 최신 제품이라 불티나게 팔릴 것이란다. 사촌 동생과 나는 '얼씨구나'하고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물 방석을 죄다 샀다. 그런데 반품은 절대 안된다고 한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금방 다 팔릴 텐데.
지금 생각하니 '덤 앤 더머'가 따로 없다.
금방 서너 배로 불어난 돈을 챙겨 집으로 갈 기대에 부푼 우리는 물 방석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왔다. 다짜고짜 지나가는 택시를 세운다. 창문 너머로
아저씨, 이거 오늘 처음 나온 물 방석이란 건데요, 이거 되게 좋거든요...
갑자기 택시기사 아저씨는 우리에게 욕을 삼태기로 한다.
와, 저 아저씨 정말 이상한 사람인가 봐. 이 좋은 걸 왜 안 사지? 세 배는 너무 많이 불렀나? 두 배만 부를걸 그랬나? 좀 더 친절하게 얘기해야 하는 거니?
뭐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택시를 세운다.
아저씨~ 아, 수고가 정말 많으세요^^ 많이 더우시죠? ㅎㅎ 이거 오늘 처음 나온 물 방석이란 아이디어 상품인데요...
우리는 또 욕을 삼태기로 먹는다. '참나, 연속으로 이상한 사람만 걸리네' 우린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해 봐도 그 동네 택시기사 아저씨들은 다 하나 같이 이상한 사람들만 있었다. 그러나 절대 굴하지 않는 무식함. 또 택시를 세운다. 그런데 이번엔 운 좋게도 너무나도 자상하고 친절한 기사분을 만났다. 이분 마저도 끝내 우리의 물 방석을 사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딱해 보였는지 우리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첫째, 손님이라고 기대하고 세웠는데 거기다가 대고 뭘 사라고 하면 우선 김이 팍 새면서 기분이 나빠진다.
둘째, 시내를 돌아다니는 택시는 빨리 손님을 태워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다.
셋째, 그러므로 기사식당 같은 데를 가서 식사 마치고 쉬고 있는 기사분들을 공략하는 것이 좋겠다.
완전 족집게 마케팅 컨설턴트였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얘긴데 동생과 나는 그때 너무 주변머리가 없었다.
마침 경신 고등학교 뒤 성북동 넘어가는 언덕 위에 돈가스로 유명한 기사식당이 있었다. 양이 많고 워낙 유명해서 우리 식구도 거기서 몇 번 돈가스를 사 먹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로 향했다. 그 기사분의 예상은 적중했다. 직원이 애당초 얘기한 것처럼 높은 가격에 팔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둘씩 팔리는 물 방석에 최소한 본전은 찾겠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한참 신나게 팔고 있는데 좀 전에 물 방석을 사가셨던 기사분이 다시 오셨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물 방석의 물이 터진 것이다. 푹신한 시트 위에선 물 방석이 터질 염려가 없는데 무심코 안전벨트 버클 같이 딱딱한 물건 위에 놓고 앉으면 쉽게 터질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매장에서 교육받을 때 그런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이 기사분 께서는 그날 사납금도 못 벌었는데 시트가 다 젖어 운행을 못하니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란다. 이를 어쩌랴.
우리는 환불을 해 드리고 연신 굽신거리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한다. 그런데 화가 단단히 나셨던 이분이 순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잠깐 생각하시더니 돌려드린 돈을 다시 우리 손에 쥐어 주시고는 그냥 돌아 가셨다. 그 모습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렇게 한바탕 하고 나니 남은 물 방석을 더는 팔 자신이 없었다. 남은 물 방석을 들고 풀이 죽어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오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누구한테 뭘 판다는 것, 장사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 돈을 번다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몇 천 원에 물 방석 하나를 팔아도 소비자의 구매심리를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품질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걸 물 방석이 가르쳐 줬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보니 이제는 이것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다.
그런데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 요즘엔 국어순화를 위해 '아르바이트' 대신 '부업'이란 단어를 쓰도록 권장하나 보다. 그러나 '부업'과 '아르바이트'는 어감이 엄연히 다르다. 부업은 보통 본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에 만족하지 않고 부수입을 더 챙기기 위해 하는 일을 말하지만 아르바이트는 본업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일거리가 없어서 집에서 오랫동안 쉬고 있는 사람에게 '너 부업 좀 할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감도 이상하지만 예의에도 어긋난 질문이다. 왜냐면 본업도 딱히 없는 사람에게 '부업'이란 단어는 왠지 사치스럽게 느껴지거니와 이 단어는 은연중에 자신에게 본업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 아르바이트 좀 할래?' 이렇게 물으면 듣는 사람은 본인이 본업이 없다는 심리적 압박감에서 벗어나 부담 없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부업'대신 그냥 '아르바이트'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