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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May 02. 2021

교회 오빠

토요일 오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이, 김집사. 잘 지내고 있냐? 보고 싶다!”     


“술 드셨어요?”     


“예끼 이 사람아! 그래도 명색이 교회 장론데, 술 먹고 전화했겠어?”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20년을 넘게 다녔던 교회의 장로님으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반가웠지만, 통화내용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난 직후, 내가 몸담았던 교회는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 간의 분쟁으로 깨져나갔다. 

한국 교회의 익숙한 모습에 더는 깊은 애정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교회는 갈라지고, 가족보다 가까웠던 사람들이 둘도 없는 원수가 되어 있었다. 

코로나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나의 젊은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곳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지금은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어 있다. 

통화가 끝난 후, 깨져나간 교회를 보면서 내가 성장했던 그곳에서의 많은 것들이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내가 처음 교회를 접했던 고등학교 1학년은 나의 어두운 역사가 시작된 시기였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중학교 시절 가까웠던 친구들을 찾아 그들이 다니는 교회를 수소문했다. 그렇게 친구들과의 만남은 일주일에 하루만 허락되는 천국과도 같았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교회 생활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계속되었다. 내 가족 중에는 기독교인이 아무도 없었기에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는 것이 가족들 사이에 불편하게 받아들여졌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에 안 좋았던 주된 이유가 교회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분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는 안 해도 교회는 꼬박꼬박 나갔기 때문이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자연스럽게 주일학교 교사로, 이른 아침 1부 예배 성가대로, 그리고 저녁예배 찬양팀으로 나의 신앙심을 여기저기서 불태우고 다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관심을 교회에서 대신 충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뭐든지 과하면 실수가 뒤따르게 되는 법. 

노래방에서 마이크 좀 잡았던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성가대원이 되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노래 한 곡 하는 게 뭐 대단한 거겠어?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막상 시작한 성가대원으로서의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더구나 형식이 갖춰진 악보를 본다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내가 성가대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소리를 시원하게 낼 줄 안다는 것뿐이었다. 어떤 음에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도 모를뿐더러 남들이 내는 소리에 딸려 들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성가대에 계속 서고 싶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방법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것은 맡고 있는 파트의 음을 암기하는 것이었다. 효과는 상당히 좋았다.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실력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 하는 성가와는 달리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하는 대규모의 특별 성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행사였다. 두 달 이상 평일에도 모여 연습하고, 성악과 학생들을 데려와서 특훈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꾸준한 준비로 나름 실력을 갖춘 성가대는 동일한 색의 정장을 갖추고, 칸타타 발표를 위해 예배단 위에 올랐다. 잠시 긴장되는 시간이 흐르고, 스포트라이트가 성가대를 향해 빛을 비추었다. 비장한 눈빛으로 지휘자의 손끝을 주시하던 모든 성가대 원들이 똑같이 숨을 고르고, 똑같이 숨을 들여 마셨다. 지휘자의 강렬한 첫 손동작에 일제히 단단하고 아름다운 소리로 첫 곡의 첫 음을 시작했다.     


중간에 솔로곡을 포함해서 40분이 넘는 시간을 오롯이 서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과 다리에 조금씩 통증이 쌓여 갔고, 단단했던 음들은 긴장감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가지고 있던 노래할 때의 버릇들이 꿈틀꿈틀 올라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부활절 칸타타의 끝은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대단원의 마지막을 맺는다. 그러나 나의 목과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 노래를 담아내기에 너무도 부족했다. 목이 마르고 급기야 갈라지기까지 했던 그때, 그래도 마지막 곡이라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부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곡은 시작되었다.      


긴 호흡의 고음을 끝으로 웅장했던 마지막 곡이 끝났다. 정적 가운데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와 일제히 켜지는 조명에 모든 게 끝났음을 알았다. 모두가 한결같이 기뻐했고 그들의 표정에서 몇 달간 준비해왔던 노력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모든 행사를 끝마치고 내려온 나에게 모든 이들이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뭔지 모를 어색한 웃음을 짓고 가는 것이었다. 처음엔 큰 행사를 마치고 난 이후라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교회를 빠져나가는 그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선배들이 내게로 다가왔고, 그들의 표정에서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 어휴 이 자식. 주님이 싸시기는 뭘 싸셔? 노래 잘해 놓고, 마지막에 가서 완전히 부활절 칸타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니까.”     


그렇다. 그해 부활절은 ‘주님 다시 사신 날’이 아니라 ‘주님 다시 싸신 날’이 되어 버렸다.    

  

합창의 생초보였던 나는 마지막 곡 이전에 모든 체력을 다 써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힘을 써야 하는 피날레, ‘주님 사셨다’를 하게 되었다. 곡의 시작과 동시에 나의 가장 나쁜 버릇인 샤우팅 창법과 갈라지는 목소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억센 발음을 내 지르고 만 것이다. 결국 나는 그날의 칸타타를 특별한 기억으로 남기고 말았다. 지금도 과거 교회에서는 부활절 곡을 연습할 때면 발음을 무척 신경 쓴다고 한다.   



        

힘든 시기에 찾았던 교회였기에,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당시, 대입 시험 탈락 이후 진학을 포기했던 나를 응원해 주었던 교회분들이 너무도 감사했다. 나 또한 ‘교회란, 신분의 차별과 부의 유무, 그리고 학력의 높낮이가 문제가 돼서는 안 된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무엇보다 성도 간의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교회의 내면까지 알게 되었던 어느 순간, 내가 교회를 바라본 시각은 ‘교회도 하나의 사회’라는 점이었다. 그곳에는 계급이 있었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있었다.      


한 번은 교회 전체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밴드를 한다는 젊은 친구가 어깨를 뒤덮는 노란색 머리로 그것도 공연 복장을 한 채로 예배에 참석했다. 가죽점퍼와 금속 장신구로 뒤덮인 부츠, 거기에 작은 쇠사슬이 감긴 벨트와 찢어진 청바지에 이르기까지. 20년 전, 당시 그의 모습은 너무도 파격적이었고, 교회라는 보수적인 공동체에서는 누가 봐도 그를 악마의 광대로 보았을 것이다. 

함께 예배를 드렸던 어르신들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고, 젊은 친구들은 신기한 듯이 그를 바라봤다. 당연히 목사님 또한 설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예배는 순식간에 잊혀졌고, 그곳에는 온전히 그의 모습만 남았다.      

‘교회가 어떻게 되려고 그런 놈이 예배를 드릴 수 있냐’며 핏대를 세우는 분들도 계셨고, 교회 젊은 친구들이 그런 사람에게 물들면 큰일 난다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러나 그 사건이 진정되기도 전에 인생에 있어 가장 극적인 반전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서울대 학생이라며? 음대를 다니면서 취미로 밴드 공연을 하는 친구라던데.”     


“이런, 그런 인재가 우리 교회를 다 오고 말이야!”     


한 주 사이에 동일한 인물이 악마에서 천사로 탈바꿈하였다. 은혜와 사랑이 아닌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으로 사람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처음 반응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어린 친구들일수록 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에 가깝게 다가가기를 원했다.      


단순한 해프닝이었던 이 일이 내게는 큰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의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집안도 아닌, 대학도 못 들어간, 그리고 키 작고 뚱뚱한 나의 열등감이 시간이 갈수록 내 눈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더 교회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들보다 잘날 수 있는 것은 일과 봉사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 장로, 권사 자식이란 것들이 말이야, 주일날 교회도 안 오고, 봉사도 안 하고 싸돌아다니기나 하고 말이지.     

- 예배당이 언제부터 연애당이 된 거야? 자기네들끼리 좋다고 붙어 다니고 말이지.  

   

밑도 끝도 없는 나만의 신앙으로 그들을 비난했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물을 먹기 시작한 교회 친구들과 선, 후배들은 점점 다른 세상 사람들이 되어갔다. 일요일마다 새로운 유행의 패션과 아이템들을 장착한 그들은 서로를 반갑게 맞이했고, 각자의 학교생활과 대학에서 유행하는 최신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무엇보다 음악과 미술을 전공하는 여자아이들의 미모는 날이 갈수록 내가 생각했던 20대 초반의 미모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만의 공간에서 나는 완전히 투명 인간이 되어 있었다. 공유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네들의 연애였다. 대학 생활과 함께 찾아온 자유는 이성에 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 안에서 그들만의 연애는 누가 봐도 아름다웠고, 부럽기까지 했다. 모든 식구가 같은 교회를 다니는 그들은 서로의 부모님과도 친하게 지내는 관계로 이어졌다. 도저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교회 내의 또 다른 카르텔이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연애는 고사하고, 어느 교회든 한 명 정도 있을법한 바보형이 나를 따라다녔다. 밥 사달라고 쫓아다니는 바보 형을 볼 때마다 속상했던 나는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드라마 OST를 틀어놓고 열등감에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난 안 되겠니? 이 생에서 다음 생에선 되겠니? ~ My Love. “        



       

군대를 제대하고 늦은 학교생활을 마친 나는 어렵사리 직장인이 되었다. 많지 않았지만,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갖지 못했던 자신감이란 것도 갖게 되었다. 어느덧 교회에서도 선배가 되어 후배들을 이끄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교회 선배 또는 교회 오빠로서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했고, 인정받고 싶었다. 예배에 참석하는 날이면 후배들을 모아 밥을 사주기도 하고, 없는 돈에 교회 행사 등에 찬조금을 내기도 여러 차례 했다. 그것이 교회에서 후배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선배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거기에 전형적인 교회 오빠의 이미지를 흉내 내기도 했다.     


”네가 00구나! 난, 00라고 해. “          


한 번은 회사 일로 서울에 있는 모 대학교 근처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일을 마친 나는 과감하게 사무실로 조기퇴근을 통보하고 그 대학에 다니는 교회 후배들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선배가 이곳까지 왔는데, 밥은 한번 사 먹여야 하지 않겠어?     


-뭘 먹여야 잘 먹었다고 좋아할라나?     


마침 관심이 있던 어느 여자 후배도 이 학교 학생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뚜. “     


한참의 신호음 이후에 끊어지는 소리. 당연히 수업 중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음 기회가 있겠지.     


스스로를 달래며 일찍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요일이 돼서 만난 그 아이와 후배들.     

 

”목요일에 학교 근처에 일하러 갔다가 전화했는데. 수업 중이었니? “     


”아니요. 일부러 안 받았어요. “     


”응? 아, 그래. “     


너무도 당당하고 간단한 대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말만큼이나 아픈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 없이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냥 내가 편하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그 아이의 말 한마디에 교회에서의 내 모습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심하게 이야기해서 ’감히 네가?‘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당당함에 ’ 밥 사줄게 ‘라며 쫓아다니는 바보형이 된 듯한 수치심까지 올라왔다.

여자를 대하는 나의 미숙함 때문이었겠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네들의 태도에 괜한 불편함이 여전하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이후, 기독교 청년들을 위한 연애 강의를 온라인에서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을 보며 깨달은 것은 나는 교회의 이성들이 생각하는 ’ 교회 오빠의 기준'에 현저히 못 미치는 존재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네들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교회 오빠라는 존재는 사회에서의 기준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훤칠한 키와 뒤떨어지지 않는 외모, 물질적인 뒷받침까지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이 투철한 신앙관과 생활 태도까지 갖춰야 진정한 교회 오빠란 존재가 되는 거였다.      


그 강의에 공감이 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많은 반성을 했다. 신앙적인 모습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틀을 잡아가는 어른이 되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은 내가 교회 내에서의 모든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교회 바보형과 자주 밥을 먹는 관계가 되었다.     


후배들 사이에서 바보형으로 오랜 시간 살아온 나는 과거 교회의 사람들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이제는 각자의 삶이 교회가 아닌 먹고사는 현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 인연의 끈이 헐거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싱글로 늙어가는 나의 삶이 불쌍해 보여서인지 지금도 종종 과거 교회분들로부터 소개팅 연락을 받는다.      


”교회 잘 다니고, 신앙은 좋은 사람이야. 한번 만나봐. “    

 

’왜? 하필 신앙 좋은 사람일까?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사실, 지금 소개받은 소개녀가 꿈꾸는 이상형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녀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는 이러한 소개를 받지 않는다. 괜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한때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 교회 오빠‘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모습 그대로, ’ 바보 형‘으로 남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놀림을 당해도, 때론 무시를 당해도 그들의 관심이라 생각하는 바보처럼 세상에서 그 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잘나고 영악해진 교회의 성도들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재물로 바쳐가며서 만든 교회마저 무너뜨리는 모습을 쉼없이 보아왔다. 나마저 그자리에 서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단순한 바보처럼 살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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