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두 명에 불과하던 방문자 수가 갑자기 늘었다. 뭔 일인가 싶었다. 이글에 쏟아냈던 감정들을 잊고 지낸 지가 2년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감정에 솔직함이 쿨하기보다 천박하게 느껴지는 나이가 지났음을 알기에, 과거가 훤히 드러난 글을 누군가에게 보인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졌다. ‘그대로 놔들까’도 생각했지만, 속 좁은 나로서는 그러기엔 밤마다 후회할 것 같았다. 속살을 살짝 가리기 위해 옷깃을 여미듯이 흩어졌던 나의 감정들을 조금은 추스르고자 한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으로 표현하실 수 있을까요?
은퇴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독보적으로 많은 대답이 ‘라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때 꿈을 향해 도전했었더라면”, “그 사람에게 고백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리고
‘그 순간 더 신중히 선택했었더라면’과 같은 후회들입니다.”
오래전에 들었던 자기 계발 강의 내용 중의 한 부분이다. 전체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라는 주제의 강의였다. 앞의 물음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도입부에서 사용했던 농담과 질문으로,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이 질문이 내 삶에 관해 하나의 물음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새로운 삶을 꿈꾸던 젊은 시절의 나에게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도 아니었지만, 현실을 쫓기에 더 바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보면 내 삶의 역사는 ‘실수와 실패’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에 비해 늦은 사춘기를 맞이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이 군대 시절보다 훨씬 끔찍했다. 이유는 나의 실수와 실패의 시작이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나 대신에 가출을 감행해 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해 삐뚤어질 기회마저 박탈당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학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아야만 했다. 공부도 곧잘 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던 나는 모두의 예상대로 인문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준수한 성적만 그대로 유지한다면 서울에 있는 대학은 무난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예정됐던 지역에서 벗어나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던 엄마가 예상치 못한 지역으로 이사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는지, 대학 진학을 잘 시킨다는 고등학교 주변으로 거주지 주소가 옮겨졌다. 친구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시험 운이 작용한 것인지, 나는 평소 받던 학교 성적에 비해 연합고사(고등학교 진학 시험) 점수를 월등히 잘 받았다. 덕분에, 내 실력과는 상관없이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상위 3% 안에 들어가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선생들의 기대와는 달리 첫 중간고사부터 형편없는 결과를 보여 주었고, 그에 따르는 대가로 가혹하리만치 고통스러운 폭력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폭력에 길들여졌고 폭력의 강도만큼 공부에 흥미를 잃어갔다. 수업 시간의 1/4은 빠따 맞는 시간이라고 할 정도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선생들로부터 다양한 구타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중에 나는 가장 바보로 취급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 정말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서울의 한 구청에서 만났다. 공무원으로 일하던 그가 내 사진을 찍어 고3 같은 반 친구들에게 보냈지만,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가 나를 알아본 유일한 동창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혼자였던 나는 마지막 탈출구로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 훈련반이라는 과정에 지원했다. 방향성을 잃은 나에게 유일한 빛이었지만, 이 마저도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반 지원자 중에 유일한 탈락자였다. 남 같은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경험한 나로서는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기대와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에 학교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자퇴를 고민했다. 그러나 지옥 같던 학교를 졸업하였고, 개근상까지 받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마도 정해진 궤도에서의 이탈과 이에 따른 결과가 당시 나로서는 더 무서웠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졸업당시 내 내신 등급은 10등급 기준으로 9등급이었다. 8등급은 받을 수 있었는데, 1점 차이로 9등급이 되었다고 3학년 담임이 놀리듯이 말해주었다. 아마도 내 등급 아래로는 육상부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시험은 한번 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평생 가본 적이 없는 지역에 있는 이름 모를 대학의 ‘농기계과’를 찍어주었다. 이 마저도 실패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억울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다만 내 나이 40이 될 때까지 고등학교에서 경험한 실패의 트라우마가 귀신처럼 따라다녔다.
술을 한잔 할 때면, 사회에 나와서 만난 믿을 만한 선배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들곤 했다.
“그까짓 것 가지고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이 말이 돼?”, “학창 시절 선생한테 안 맞아 본 사람 어디 있어?”, “다, 너 잘되라고 한 일이야. 너만 열심히 했으면 무슨 문제가 됐겠냐?”
답답한 마음에 꺼내 놓은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항상 똑같았다. [누굴 탓하겠나!] 마치 술만 먹으면 과거를 한탄하던 아버지의 버릇을 닮은 것 같아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이젠 조심스러워한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꼼짝없이 두 달을 집에서 누워만 있었다. 고통스러운 폭력에서 해방됐다는 기쁨도 잠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로 인해 마음속 고통은 계속되었다.
‘이제 뭐 하고 살지? 뭐 먹고살지? 직업학교라도 알아봐야 하나? “
머릿속에는 해답 없는 질문들만이 가득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책상에 놓여있던 천 원짜리 몇 장을 가지고 두 달 만에 세상 밖으로 나섰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알아본 기술학원을 찾아갔다. 공돌이로 살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기에, ‘누구나 최고의 기술자가 될 수 있다’는 학원 문구만 보고 그날 바로 등록을 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돈 버는 것이 목적인 사설학원들은 나 같은 어리숙한 백수들을 가장 손쉬운 돈벌이 대상으로 삼았다. 기술이라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입학 담당자들의 말만 믿고 내 인생의 방향을 일순간에 결정해 버린 샘이었다.
이것만 공부하면 된다는 말에 공업 고등학생들이 딴다는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고, 실기 시험이라는 것에 전혀 경험이 없던 나는 몇 번의 실패 후에 어렵사리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맛본 첫 합격의 기쁨도 잠시, 사회라는 커다란 벽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회사를 찾아다녔고 면접을 보았다. 그러나 인문계를 졸업한 나를 자격증만으로 받아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격증을 따면 뭐라도 해 먹고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지만 현실은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학교에 도전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밑바닥 성적으로 다시 대학을 도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자격증으로 입학할 수 있는 전문대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동기들에 비해 한참 늦은 입학과 군대 그리고 졸업은 이 사회에서 나를 격리시키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당시에 만연했던 '나이 제한'이란 제도는 정규직 입사를 도전조차 할 수 없게 했다. 더구나 IMF로 인해 회사들은 현장 채용직이나 계약직 인원만을 뽑았다. 건설 경기가 호황이었던 시절이 끝나고 매년 쏟아지는 졸업생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시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가득했던 시기로 기억이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에게 절실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방향성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미생의 장그래처럼 열심히만 하면 뭐라도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그 목표를 찾을 수가 없었다. 툭툭 던져지는 조각난 일들과 권위적인 선배들의 행동에 나는 점점 주눅이 들었다. 반복된 나의 실수에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방향성을 잃은 채로 시작한 엔지니어로서의 경력이 20년이 되었다. 어쩌면 고등학교의 개근상처럼 이것이 내 삶의 두 번째 아이러니인 샘이다.
회사에서 일을 수주하기 위해 거래처에 엔지니어 인원 현황을 보고하는 경우가 있다. 거래처에 회사의 규모를 설명하기 위한 자료로서 각 직원들의 등급을 기입해 놓은 표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 업계가 현재의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준비된 서류를 조심스레 들춰 보았다.
직급: 차장, 등급: 고급기술자.
소고기 등급 매기듯이, 기술자들의 등급이 경력과 자격 사항에 따라 매겨져 있었다. 조금은 놀라웠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등급이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조금 위 또는 아래 정도의 실력으로 지금까지 인식해 왔다. 수없이 저질렀던 실수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들, 방향성 없이 일해온 엔지니어로서의 삶 그리고 고등학교의 9등급까지.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 나의 기준이 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회사에서 팀의 리더로 일한 지도 2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새롭게 만난 어린 동료들과 일을 진행하다 보면 그들의 실수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반응과 태도를 팀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지켜보게 된다. 나는 그들의 실수와 모자람을 탓하거나 질타하지 않는다. 나 또한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절망하기를 수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선배들의 꼰대 같은 비판과 쏟아지는 질타에 ‘이 업계에서 밥 빌어먹고 살기에 어렵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내가 지금의 어린 동료들을 보면서 바라는 것은 그들의 실수가 실패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실수에 따른 실패의 반복은 내가 경험한 것처럼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잃게 만든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그들을 가르치고, 길라잡이가 되어 주라고 말한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심적으로는 정중히 거절한 상태이다. 내가 누군가를 이끌만한 깜냥도 안되지만 또 다른 유형의 낭만적인 꼰대가 되고 싶지도 않다. 삶의 한 모퉁이에서 잠시 동료로 만나 것도 인연일진대, 같이 동행하면서 말동무나 되어 줄까 싶다.
참고로 한마디만 더 하자면, 내 고등학교 시절의 실패에 대해 질타했던 엔지니어 선배의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의 또 한 번의 아이러니를 갖게 됐다. 남들이 겪는 고통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어떤 고통보다 크다는 것을 그의 죽음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를 위로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