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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Apr 11. 2021

실수, 그리고 실패의 역사

중고 신입네 번째이야기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으로 표현하실 수 있을까요? 

은퇴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독보적으로 많은 대답이 ‘라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때 꿈을 향해 도전했었더라면”, “그 사람에게 고백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리고 

‘그 순간 더 신중히 선택했었더라면’과 같은 후회들입니다.”     


오래전에 들었던 자기 계발 강의 내용 중의 한 부분이다. 전체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라는 주제의 강의였다. 앞의 물음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도입부에서 사용했던 농담과 질문으로,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또렷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이 질문이 내 삶에 관한 하나의 물음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간단한 질문과 답변이지만, 새로운 삶을 꿈꾸던 젊은 나이에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도 아니었지만, 미래를 꿈꾸기에 더 바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 삶에 있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말할 수 있는 답은 ‘실수 그리고 실패’이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의 역사는 ‘실수와 실패’의 반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이 군대 시절을 가장 힘든 시기 또는 끔찍했던 시기로 꼽는다. 그러나 남들에 비해 늦은 사춘기를 맞이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이 군대 시절보다 훨씬 끔찍했다. 이유는 나의 실수와 실패의 시작이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나 대신에 가출을 감행해 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해 삐뚤어질 기회마저 박탈당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학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아야만 했다. 공부도 곧잘 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던 나는 모두의 예상대로 인문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학교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입학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인생에 전혀 관심이 없던 엄마와 다른 친척들의 간섭으로 인해 내 주소지는 대학 진학을 잘 시킨다는 고등학교 주변으로 옮겨졌고, 친구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평소 보여 주었던 실력에 비해 연합고사(고등학교 진학 시험) 점수를 월등히 잘 받아 버렸다. 덕분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상위 3% 안에 들어가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처럼 선생들의 기대와는 달리 첫 시험부터 형편없는 결과를 보여 주었고, 그에 따르는 대가로 가혹하리만치 고통스러운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폭력에 길들여지는 만큼 점점 공부에 흥미를 잃어갔다. 수업 시간의 1/4은 빠따 맞는 시간이라고 할 정도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선생들로부터 다양한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등학교 내내 혼자였던 나는 마지막 탈출구로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 훈련반이라는 과정에 지원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나의 선택이 아닌 부모와 남들의 선택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경험한 나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더 이상의 기대와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학교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자퇴를 고민했지만, 지옥 같던 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개근상까지 받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마도 무단이탈에 따른 보복이 더 무서웠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대학 입학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내신 등급이 10등급 기준으로 9등급으로 졸업을 맞이했다. 아마도 내 등급 아래로는 체육부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선택의 실수가 3년 뒤, 인생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다. 더 웃기는 것은 스스로가 선택하고 이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선택과 이에 따른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못내 억울했다. 내 나이 40이 될 때까지 고등학교에서 경험한 실패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까짓 것 가지고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이 말이 돼?”, “학창 시절 선생한테 안 맞아 본 사람 어디 있어?”, “다, 너 잘되라고 한 일이야. 너만 열심히 했으면 무슨 문제가 됐겠냐?”     


내가 약해빠진 것도, 환경에 적응을 못하는 인물인 것도 맞다. 그러기에 나를 이끌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꼼짝없이 두 달을 집에서 누워만 있었다. 고통스러운 폭력에서 해방됐다는 기쁨도 잠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의 삶으로 인해 마음속 고통은 계속되었다.      

‘이제 뭐 하고 살지? 뭐 먹고살지? 직업학교라도 알아봐야 하나? “     

머릿속에는 해답 없는 질문들만이 가득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책상에 놓여있던 천 원짜리 몇 장을 가지고 두 달 만에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는 무턱대고 알아본 기술학원에 등록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돈 버는 것이 목적인 사설학원들은 나 같은 어리숙한 백수들을 가장 손쉬운 돈벌이 대상으로 삼았다. 기술이라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입학 담당자들의 말만 믿고 내 인생의 방향을 일순간에 결정해 버렸다. 

이것만 공부하면 된다는 말에 공업 고등학생들이 딴다는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고, 실기 시험이라는 것에 전혀 경험이 없던 나는 몇 번의 실패 후에 어렵사리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맛본 합격의 기쁨이라 아직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자격증을 땄다는 자신감에 나는 취업 후에 돈부터 벌겠다는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그리고 여러 회사를 찾아가 면접을 보았다. 그러나 인문계를 졸업한 나를 자격증만으로 취업시켜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뭐라도 해 먹고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마저 무너진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학교에 도전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어렵게 자격증으로 입학할 수 있는 전문대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늦은 입학과 졸업은 나이 제한에 따른 정규직 입사를 할 수 없게 했을뿐더러, IMF로 인해 회사들은 현장 채용직이나 계약직 인원만을 뽑았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아무런 경력이 없었기에 다른 신입들과 똑같이 잦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랄한 질타와 나이에 대한 조롱에 남들보다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했던 그들의 말이 아직 귓가를 맴돈다.    

 

”원래 일이란 게 이렇게 혼나면서 배우는 거야. “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에게 절실했던 것은 일에 관한 올바른 설명과 방향성이었을 것이다. 툭툭 던져지는 일들과 권위적인 선배들의 말과 행동에 나는 점점 주눅이 들었고 실수가 많아졌다. 그렇게 시작한 엔지니어로서의 경력이 20년을 넘기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아이러니이다.    

  

가끔 회사에서 일을 수주하기 위해 거래처에 엔지니어 인원 현황을 보는 경우가 있다. 거래처 임원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만든 서류이기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이 업계에서 나에 대한 등급을 어떻게 매기고 있는지 궁금해서 서류를 한번 본 적이 있다.       


직급: 차장, 등급: 고급기술자.     


소고기 등급 매기듯이, 기술자들의 등급을 경력 또는 자격 사항에 따라 매겨져 있었다. 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등급이 생각보다 높았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했던 나의 등급은 중간에서 조금 위 또는 아래 정도의 실력으로 인식해 왔다. 일을 하면서 수없이 저질렀던 실수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들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서 일수도 있다. 고급스럽지 못한 나의 역사에 부끄러울 때가 많다.     




새로운 회사에서 팀의 리더로 일한 지도 2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새롭게 만나 어린 동료들과 일을 진행하다 보면 그들의 실수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반응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팀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관찰하게 된다. 어떤 친구는 일을 너무도 느리게 진행하기도 하고, 어떤 동료는 시키는 일만 몰두하는 미흡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실수와 모자람을 탓하거나 질타하지 않는다. 이유는 나 또한 그들 나이에 그러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절망하기를 수없이 했다. 심지어는 선배들의 꼰대 같은 비판과 쏟아지는 질타에 ‘이 업계에서 밥 빌어먹고 살기에 어렵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이것이다. 작게는 일을 바르게 알려줄 선배가 없었다는 것과 넓게는 인생에 있어서 내 선택을 도와줄 스승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 대신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앞서간 이를 찾지 못했기에 인생을 헤매고 돌아다녔던 것 같다.

내가 지금의 어린 동료들을 보면서 바라는 것은 그들의 실수가 실패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실수에 따른 실패의 반복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처럼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삶의 한 모퉁이에서 만나 잠시 동행하는 것도 인연일진대, 실수와 실패의 역사를 간직한 선배로서 그들의 길라잡이가 되어볼까 생각 중이다.          


참고로 한마디만 더 하자면, 내 고등학교 시절의 실패에 대해 질타했던 엔지니어 선배는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의 또 한 번의 아이러니를 갖게 됐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보면서 생각했다. 남들이 겪는 고통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라고. 그를 위로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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