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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Sep 23. 2024

거절할 권리

중고 신입의 스물한 번째 이야기

현장 철수 전, 발주처로부터 다시금 한 달 연장 요청을 받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계약만료 이틀 전 요청이라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행기표도 예매했고, 여기 아파트도 계약이 끝난 상태라서요. 나이 때문인지 몸도 예년 같지 않네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중년의 남자로 분한 나는 혼신의 연기를 해보았지만,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발주처의 입장은 단호했다. 자신들이 필요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청이 아닌 명령이었다.


“그런 것들은 일정 조정하면 되고, 병원이야 한 달 늦게 간다고 죽는 것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추가적인 돈은 들겠지만 비행기표야 연기하면 되고 아파트가 안되면 Airbnb나 호텔로 가면 된다. 사실 먹어야 할 약도 충분히 받아둔 상태였다. 다만 그들과 더는 같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런저런 핑계 뒤로 나를 숨기고 있었다. 


[여기 생활도 20개월 만땅이다. 요즘 군대도 18개월인데, 작작 좀 하자.]


어쨌든 한 번의 연장을 버텼고 나름의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을’이 할 수 있는 마지막권한을 행사해 보기로 했다. ‘줄행랑’이었다.


“아니요. 나 돌아갈래.”


마음만은 ‘박하사탕’의 영호(설경구)처럼 면전에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나에게 연장을 종용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마무리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였다. 트랙을 도는 경주마의 기수처럼 예정된 트랙을 최단시간에 돌파하면 관리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들에게 주변 현장인원들은 같은 트랙을 도는 경쟁자로 인식되었다. 다른 현장과 비교될 때마다 더 강하게 채찍을 내려쳤고, 나는 눈 돌릴 틈 없이 결승점만을 보며 달려야 했다. 어느덧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지나간 자리엔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 존재했다. 결국 일정을 연장시키는 문제로 남게 됐다. 물론 나의 실수도 있었지만, 관리적인 실수가 더 크게 작용한 문제들이었다. 같은 관리자 밑에서 모든 하청업체들이 반복적으로 경험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 습관처럼 자신들의 일을 대신할 하청업체를 찾고 그들에게 일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미 도면과 서류는 사용이 가능하다는 ‘Approved, 승인’을 지역 시청으로부터 받은 상태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마무리된 상태였다. 문제는 공장에 물을 공급하기로 한 대형 물탱크 제작 일정이 공장 건설 일정과 맞지 않았다. 시간차로 인한 물공급이 어렵게 되자 건물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공장을 운영해야 할 발주처의 닦달에 건설사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문제는 관공서 담당자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자신들의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일은 아래로 흐르고 흘러 하청업체 직원까지 이어졌다. 담당 공무원에게 처리과정에 관한 문의 메일을 보내고 필요한 서류를 꾸며야 했다. 일정이 미뤄지면 이유를 찾아 발주처에 전달할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 일들이 마무리될 때까지 자신들의 일을 대신할 업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경주가 끝났으니 물건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라는 식이었다.




내 의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한 건설사 관리자는 조금은 누르러진 말투로 당근을 제시했다. 


“한국 돌아가야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렇게 서두르셔? 한국가도 어차피 혼자 계시잖아. 여기 있으면 돈도 더 받고, 주말 되면 골프도 치고, 가까운데 여행도 다니면서 월급 받는 게 좋지 않아요?”


항상 써먹던 수법이 이번에도 통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요.” 마지못한 척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그들의 말에 별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들의 태도는 일순간에 크게 변했다. 그리고 업체의 가장 큰 약점을 골라 깊게 찔러 들어왔다.


“아, 참. 갑자기 생각나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번 프로젝트 평가 있는 것 아시죠? 높은 점수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년도 우리 회사 수주와 관련해서 반영되는 거니까 본사 차원에서 관리 좀 하셔야 할 겁니다. 물론 실장님 기간 연장하고는 무관하게 점수를 매기는 거라 오해는 없으셨으면 하네요. 그리고.”


또 뭐가 있다는 건지. 도미노 쓰러지듯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힘을 유감없이 행사하기 시작했다.


“제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설계변경 건에 대해서는 어렵겠네요. 마무리협상 때 금액 조정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들의 갑질은 여전했다. 표현하는 행태가 조금 교묘해졌을 뿐이다. ‘우리가 왜 당신들에게 이 많은 돈을 줘가면서 일을 시키겠어요. 이런 일 하라고 그 돈 드리는 겁니다.’ 프로젝트 초반 하루가 멀다 하고 떠들던 ‘협력’이란 단어 대신에 ‘’이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섰다. 일을 시키는 입장에서 가장 크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돈을 어떻게 주느냐’, ‘어떤 방식으로 주느냐’이다. 협박 이후에 이어지는 ‘협상의 여지’나, ‘미루어진 일정’은 업체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계약서에 싸인했으니 주는 돈 이상으로 일을 하라고 한다. 학교에서는 계약서 작성 시 꼼꼼하게 읽고 불리한 조건들은 반드시 수정하라고 배운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계약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약 자체를 할 수가 없다. 계약서에는 애매한 경계에 있는 일까지도 업자(노예라는 말을 쓰고 싶지만 나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말처럼 들려서 업계의 말로 대신했다)가 해야 한다는 식이다. 마치 ‘마름’이 ‘지주’ 대신에 종들을 쥐어짜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건설사 담당자들은 이런 일들에 능숙해진다. 자신들도 나름 힘들다고는 말하지만, 원하는 것들이 충족될 때까지 불만의 강도는 계속해서 상승한다. 성과에 미치지 못하거나 마음에 안 들 때면 하청업체 직원을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사하곤 한다. 


그날 저녁, 예상대로 한국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임원의 설득과 회유를 통화 내내 견뎌야만 했다. 회의는 길어졌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땜방이니 자리만 지키다가 귀국하라고 임원은 말하지만, 건설사의 갑질에 그렇게 안될 거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이어서 많은 혜택들을 선물처럼 내 앞에 가져다 놓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탐탁지 않았다. 결국 오랫동안 묵혀왔던 말을 내뱉고 나서야 늦은 저녁회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니요. 예정대로 다음 주에 비행기 타겠습니다."


 나에게도 ‘거절할 권리’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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