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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Jun 05. 2024

뻗치기

중고 신입의 스무 번째 이야기

월요일은 아침 기상이 더 버겁게 느껴진다.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 갈수록 더욱 그러하다. 하루하루 정리해야 할 일들은 한 주를 마무리하는 주말까지 쌓여 갔고, 주말 동안 만들어진 요구사항들은 정돈되지 않은 채로 한 주를 시작하는 아침마다 밀려왔다. 


월요일 아침, 

오늘은 댓바람부터 거래처 (미국 현지 설계사무소)에서 일명 ‘뻗치기’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몇 주전에 받기로 했던 변경된 도면들과 구조 계산서를 아직 받지 못한 상태였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 위한 중요한 서류들이다 보니 현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압박은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기업과 일한다는 것은 상당한 신용을 담보한다고 볼 수 있다. ‘돈이 늦어지는 경우는 있어도, 절대 떼이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협력 업체들은 대기업이 제시하는 업무와 일정에 모든 것을 맞춘다.  하지만 미국 업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업체 간의 관계설정을 만들어 간다.  아무리 대기업과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식의 신용을 믿지 않는다. 계약된 돈이 지불되지 않을 경우 일을 당장에 멈춰 세운다. 이번 사업 초기에도 시행착오를 여러 차례 겪었었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합리적인 관계설정이겠지만, 일을 시키는 한국 매니저로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내가 담당하는 미국 업체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업무를 뒤로 미룬 상태였다. 계속된 이메일과 전화로는 담당자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결국 발주처의 강압적인 요구(명령)에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니, 이런 일까지 우리 보고 하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결국에는 변경 금액을 안 줘서 현지 업체도 작업 내용을 안 주고 버티는 건데. 우리가 무슨 미끼도 아니고. 저쪽 반응 보겠다고, 약속도 없이 디미냐고!”


“그냥 맘 편하게 가자고요. 안 가고 싶다고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 안되면 커피나 얻어 마시면서 시간 때우다가 돌아가면 되고, 담당자들 못 만났다고 하면 되죠 뭐.”


남의 일처럼 말하는 어린 동료가 부러웠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나와 동료는 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나름의 작전을 세웠다. 그나마 이야기하기 편한 현지 업체의 한국인 직원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김 차장입니다. 약속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가 없네요. 저희 발주처에서 말입니다. 그게…]


내 의지로 찾아온 것이 아닌, 발주처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찾아왔음을 설명하는 문자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조잡스러운 문자를 보고 있자니 나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써 내려갔던 문자를 지우고 간단히 용건만 다시 작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인 직원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담당하는 분들이 회의가 많아서 만나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명거리라도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도 잠시 올라오시지요. 쉬는 시간에 만날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곳 미국에선 아무런 약속 없이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큰 실례가 된다. 다른 나라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통적으로 미국은 이런 점에 있어서 그리 관대하지가 않다. 심지어 식당이나 자동차 수리 또한 예약을 걸어놓지 않으면, 몇 시간을 허비하기가 다반사다. 그래도 한국 대기업을 상대하는 우리로서는 발주처가 원하는 일을 흉내라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감사합니다.]


한국인 직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녀가 급하게 마련한 빈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담당자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담당자들은 미리 잡혀있던 회의를 진행하느라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기다리는 내내 미국에서의 남은 일정을 손꼽아가며 서로를 위로했다.


“준공도 받아야 되고, 공사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이번 달에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발주처가 지랄해 봐야 계약기간 채우면 끝나는 거고. 우리는 권한이 없으니 본사하고 처리하라고 하면 되죠.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조금만 버티면 끝나지 않겠어요! 담당자들은 별생각 없어 보이던데.”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는 어느덧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순간, 누군가와 잡담을 나누는 구조 담당자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쥐를 발견한 고양이 마냥 뒤를 따라 그의 방으로 향했다.


“Good morning Rob!”


반쯤 열린 구조 담당자 사무실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나지막이 인사를 건넸다. 나의 얼굴을 기억했던 미국인 담당자는 놀람과 어이없음의 중간 어디쯤의 묘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어쩐 일이야?”


“내가 보낸 이메일 읽어 봤어?  우리가 너무 급해서 그런데, 요청한 사항들 빨리 좀 처리해 주면 안 될까? 아니면 일정이라도.”


무례한 줄 알면서도 다른 담당자들과도 2~3분의 짧은 만남과 기다림을 이어갔다. 미국 담당자들은 젠틀하게 우리를 대해 줬지만,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모두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어렵사리 시작된 짧은 만남들은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한국인 직원의 도움이 너무도 감사했기에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녀는 다음 기회에 하자며 우리의 제안을 쿨하게 거절했다. 


거래처 사무소를 나서자 4월임에도 불구하고 밖은 이미 30도가 넘는 여름 날씨였다.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아래 자동차를 세워 두었다. 시간이 지나 하늘 높이 올라간 태양으로 인해 자동차는 어느새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차문을 열자 안에서 달궈진 공기가 터져 나왔다. 몸을 한번 휘감은 공기는 내 몸의 수분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듯했다. 차의 시동을 걸고 문을 열어 둔 채로 에어컨을 최대치로 올렸다.

뻗치기에 지친 동료와 나는 흙먼지 자욱한 현장 사무실로의 복귀가 못내 아쉬웠다. 오전 내내 받았던 부담감을 풀기 위해서라도 뭔가 힐링이 될 만한 일을 찾아야만 했다. 막상 자동차에 올라타니 생각나는 것은 오롯이 한국 음식밖에 없었다. 


“이런 날은 매콤한 순두부찌개가 생각난다니까. 시원한 냉면도 좋고.”


“저는 순댓국이요. 한국 도착하면 소주에 순댓국부터 한 그릇 할 거예요.”


우리는 출장을 가장한 땡땡이를 치기로 결정했다.  현장 사무실에서 한 시간가량 걸리는 한인 식당으로 향했다. 너무도 오른 물가에 세금과 팁까지, 웬만해서는 오기 어려운 한인 식당에 오랜만의 행차였다. 4월의 무더위를 식혀 줄 에어컨의 시원함보다 짭조름한 특유의 한국 음식의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식당 직원이 우리를 시원한 자리로 안내했다.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뻗치기가 가능하네요. 한국 기술자들을 많이 상대해서 그런가, 아주 아메리카 식은 아닌 것 같아요.”


막무가내로 맡겨진 일을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동료가 꺼낸 말이었다. 그의 말에 나름 궁금함이 생겼다. ‘왜 우리를 만나 줬을까?’, ‘서툰 영어에 거래처까지 찾아와 애걸하는 우리가 불쌍해서?’, ‘아니면 일에 대한 간절함이 보여서?’ 무엇이든 계약과 돈이 아니면 움직이질 않는 그들이 왜. 전에 일했던 선배가 버릇처럼 쓰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이고, 미국 놈들도 사람인지라 다 통하는 법이겠지.”


선배가 이 말을 자주 했던 이유는 직원들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공무원들을 상대하거나 민원에 가까운 일을 처리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어려움에 부딪히라는 독려의 말이었다. 장소와 사람이 뀌어도, 인간의 본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오늘 일도 한국 기업 식의 해결 방법이 먹힌 샘이었다. 


어려 보이는 멕시코 직원이 반찬들과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고생 많았어. 자 먹자고.”


음식을 앞에 둔 40대 아저씨들의 얼굴이 일곱 살 아이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교 끝나고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사 먹던 어린 시절의 표정이랄까. 따끈한 열기와 함께 음식 냄새가 올라왔다. 허기짐이 진하게 느껴졌다. 


“콩나물 무침이 뭐라고. 한국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반찬인데. 외국에서 보니까 참 귀하게 느껴져.”


평소에 먹기 힘든 한국 반찬에 젓가락이 먼저 갔다. 참기름에 버무려진 콩나물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메인으로 나온 찌개를 국자로 펐다. 기다린 만큼 첫술을 맛있게 먹고 싶어서 찌개를 밥 위에 얹었다. 꼼꼼하게 밥과 찌개를 버무리는 사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문자네요. 식사하고 보시죠!”


동료의 말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올라간 손에는 이미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엄지 손가락으로 밀어 올린 문자는 막연한 불안함을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현장 파견 인원 및 기간 연장 요청의 건. 건축설계 인원의 2달간 파견 연장.]


발주처로부터 날아온 문자 메시지였다. 발주처의 요청은 거절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다. 연장 요청에 관한 문자는 이미 내가 속한 회사와 이야기가 끝난 상태라는 것을 의미했다.


“어쩌죠, 차장님? 3주만 버티면 집으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뻗치기’를 두 달이나 더 해야 하는 거예요?”


“아하, 씨X.”


들고 있던 숟가락을 던질 수는 없었지만, 입에서 튀어나오는 쌍 욕은 막을 길이 없었다. 실망감에 인내심이 무너진 나는 카운터 옆에 업소용 냉장고를 찾아냈다. 안에는 한국에서 자주 마시던 녹색 병들이 가득했다. 서빙하는 멕시코 아가씨를 큰 소리로 불렀다. 


“Hey, senorita(아가씨) 여기 쏘주.  ONE BOTTLE. Please!”


몽롱한 오후, 남은 세 달도 이렇게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엔지니어 사무소 주차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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