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겠다고 한국(본사)에 연락했어요. 기술자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이런 현장 처음이에요.”
나와 같은 업무를 하는 다른 회사 기술자로서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이다. 나이뿐만 아니라 회사 직급으로도 나보다 경력이 한참 위에 있는 분이다. 그러나 전화상으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체념이 깊이 묻어났다.
“아직 회사에서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는데, 이번 달 안에 한국으로 돌아가려고요. 이러다간 화병 나서 죽을 것 같아요. 나머지는 회사 차원에서 대응하겠죠.”
그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발주처(물건이나 일 따위를 주문한 기관이나 단체)가 같은 것도 있었지만, 기술자로 해외에서 같이 고생한다는 동업자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같은 시기에 파견 나와서 비슷한 문제들을 함께 겪었다. 같은 사무실을 사용할 당시에는 똑같은 문제들로 건설사 관리자로부터 같이 욕먹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였을까? 필요할 때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고, 가끔은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현장 업무가 시작되면서 각자 맡은 현장으로 이동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건설사 전담 욕받이가 된 것 같아요. 잘못하면 비 오는 날 벌거벗고 현장 뛰어다닐지도 모르겠어요. 그전에 한국 돌아가야죠.”
그는 안전 교육 때 우리끼리 했던 농담을 빗대어 자신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정말 힘들면, 비 오는 날 벌거벗고 현장 뛰어다니자고요. 안전 요원들한테 걸려서 한국으로 쫓겨날 수 있지 않을까요?]
계속되는 그의 한탄에 나도 뭐라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쪽 프로젝트 지금까지 끌고 오셨는데, 이사님 안 계시면 누가 마무리하겠어요?”
하지만 위로랍시고 한 말이 그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관리자란 놈들이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에요. 그만둬야겠다는 말에 두말없이 ‘그러라‘고 하더군요. 김 차장님도 아시겠지만, 다른 프로젝트에, 다른 엔지니어 회사들이 일하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일로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건 기술자 문제가 아니라 관리자 문제 아닌가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순살자이’ 만들겠어요. 다 위에서 찍어 누르니까 하는 것 아니냐고요!”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그의 말에서 점점 격해지는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 앞에서 은근히 경력 자랑이나 해대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으스대는데. 우리가 작업 안 해주면 별것 없는 것들 아니에요! 가뜩이나 기술자가 없다고 난리들인데, 관리자들만 잔뜩 모여서 우리 목 졸라봐야 무슨 소용이냐고요.”
그의 말이 다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으로는 격하게 동의가 되었다. 아무리 기술자로 몇십 년을 이 바닥에서 굴러도 정작 모든 결정은 관리자들이 갖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결정한 사람이 책임도 지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프로젝트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소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발주처 관리자든, 건설회사 관리자든, 핑곗거리를 대든,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내가 속한 분야의 일들이 뉴스에 나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안 좋은 일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요즘 계속해서 한국 뉴스에 오르내리는 ’순살 자이‘, ’통뼈 캐슬‘등을 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깊은 생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뉴스를 찾아볼수록 자괴감이 커져만 갔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 철근 한 가닥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 지난날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론은 문제의 원인을 ’무량판 구조‘라는 기술적인 문제로 결론을 내는 분위기다. 그러나 교과서에도 나오는 공법이 잘못되었다고 매도하는 것은 기술자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과연 이런 식의 결론 도출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방안인지 반문하고 싶어 진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이다.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이 구축되고 매뉴얼이 있어도 그것을 바르게 유지하는 사람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 누군가는 철근을 빼라고 지시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품질 낮은 콘크리트를 쓰라고 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과연 기술자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싶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이지만, 관리자들은 자신이 속한 회사 기준에 기술자들을 맞추기 바쁘다. 심지어 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틀에 기술자들을 구겨 넣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돈과 시간은 물론이고, 상식 이상의 일들을 기술자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김 차장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아세요? 하루가 멀다 하고 넘어오는 설계변경은 그렇다 치고, 계약에도 없는 3D 작업을 하라는 거예요. 못하겠다고 하니까. ‘다른 회사들은 아무 소리 없이 다 하는데, 거기만 안 하냐’ 면서, 쌍욕만 안 했지, 엄청나게 지랄하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지들 시다바리냐고요. 자존심 상해서 정말.”
어디서 배웠는지 관리자들은 기술자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경우에 따라, 개인의 자존심을 긁거나 협박에 가까운 언사들을 서슴지 않고 뱉는다.
“이번 주 안으로 발주 나갈 건데, 도면이 안 돼서 현장 일정 밀리거나 차질 생기면 차장님 책임지셔야 돼요. 어떻게든 일정에 맞추시던가, 돈 많으시면 맘대로 하시던가.”
‘안되면 되게 하라’는 개발도상국 식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부실이 가득한 이윤추구는 계속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관리자와 기술자 사이의 갑을 관계를 협력적인 관계로 만들어가지 못한다면, 이미 시작된 젊은 기술자들의 이탈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점점 얇아지는 기술자들의 숫자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만들뿐더러, 결국엔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처럼 외국인 기술자들을 수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미 중국계와 제3세계 현장 노동자들 없이는 건설 현장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건설 현장뿐만 아니라 기술 분야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관리자들의 업무 한계와 통제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들었던 ’기술 한국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