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문장
2016.12월 어느 추운 겨울 유엔 본부 지하 제5회의실(Conference Room 5).
G77 대표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높을 필요가 없었다. 방 안의 공기가 이미 그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고함이 아니라 결론이었고, 결론은 늘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나는 스톱워치를 멈추지 않은 채, 노트의 빈칸을 더 이상 빈칸으로 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우리가 봉합해야 하는 것은 문단이 아니라 체면이었다.
“코디네이터, 그 문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느 문장을 말씀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감축 경로의 가시화’가 원칙으로 명시돼야 한다는 부분.” G77가 말했다. “그 표현은 특정 부문을 겨냥하는 창구가 됩니다. 우리에겐 ‘가시화’가 곧 ‘표적화’로 읽힙니다.”
EU가 바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가시화’ 없이 어떻게 책임성을 담보합니까? 아웃라인은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가 마이크를 켰다. 그의 말은 늘 짧은데, 짧아서 더 멀리 간다. “가시화는 협박이 아닙니다. 협박은 불투명합니다.”
작은 도서국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 분 다 이해됩니다. 우리는 규율도 필요하고, 보호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단어 하나가 다음 달 수도에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모두가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은 질문이 아니라 과제였다. ‘이기지 않는 문장’으로 봉합하라는 과제. 누가 이기면 누군가는 진다. 제5위원회에서 패배는 곧 국내 보고서의 문장으로 남고, 그 문장은 사람의 경력을 깎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합의를 원하면서도 패배는 원하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그 모순을 문장으로 숨기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내가 마이크를 켰다. “지금 상황을 선택지로 정리하겠습니다. A는 ‘감축 경로의 가시화’를 원칙으로 명시하는 것. B는 표현을 완화하고, 대신 다른 문단에서 책임성을 보강하는 것. 양쪽 다 원칙을 주장합니다. 그러니 ‘원칙 대 원칙’이 아니라, ‘문장 구조 대 문장 구조’로 가야 합니다.”
“구조가 뭐가 달라집니까?” EU가 물었다.
“문장이 누구를 겨냥하는지가 달라집니다.” 내가 답했다. “우리는 특정 프로그램을 겨냥하지 않는 규율의 언어를 만들고, 동시에 공여국이 요구하는 책임성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말은 좋습니다. 하지만 결국 숫자입니다.”
“숫자를 보호하려면, 문장을 먼저 보호해야 합니다.” 내가 되받았다. “문장이 깨지면 숫자는 표결로 갑니다.”
그리고 “제안 문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만. 그리고 그 문구로 합의가 가능한지 확인합시다.”
나는 펜으로 노트의 위쪽에 한 줄을 적었다. 단어를 고르는 일은 종종 외교보다 더 잔혹하다. ‘가시화’라는 단어를 그대로 두면 개발도상국이 불안해하고, 빼면 공여국이 불안해한다. 그래서 나는 단어를 바꾸지 않았다. 대신 문장의 주어를 바꿨다. 누가 무엇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한다’로.
“제안 문구입니다.” 내가 읽었다. “본 위원회는 예산 아웃라인 논의 과정에서 책임성과 투명성을 제고할 필요성을 인식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특정 프로그램이나 지역을 표적화하지 않은 방식으로 효율성 및 절감 조치를 검토하기로 한다.”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조용함은 늘 좋은 신호처럼 보이지만, 제5위원회에서는 조용함도 여러 종류다. 이 조용함은 문장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모두가 자기 수도에서 이 문장을 어떻게 설명할지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있었다.
G77 대표가 먼저 물었다. “여기서 ‘절감 조치’는 ‘개발을 위한 지역 협력’까지 포함됩니까?”
“문장은 포함도 배제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대신 ‘표적화하지 않는다’로 방패를 세워 두었습니다.”
“그 방패가 충분히 두껍습니까?” G77이 다시 물었다.
EU가 끼어들었다. “그 방패는 좋습니다. 그러나 공여국이 요구하는 ‘경로’는 어디에 있습니까? ‘투명성 제고’는 너무 일반적입니다.”
그가 마이크를 켰다. “맞습니다. 나는 ‘투명성’보다 ‘가시성’을 원합니다.”
나는 그를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정면으로 보면, 그는 나의 표정을 증거로 삼을 것이다. 대신 문장으로만 싸웠다. “그럼 ‘경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검토 방식’을 명시하겠습니다. 경로는 방향이고, 방향은 위협처럼 들릴 수 있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나는 두 번째 줄을 적었다. 이번엔 ‘가시화’ 대신 ‘보고’라는 단어를 넣었다. 보고는 공격이 아니라 절차로 들린다. 절차는 이 방에서 가장 안전한 언어다.
“추가 문구입니다.” 내가 읽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무국은 비용 절감 및 효율성 조치의 적용에 관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하며, 회원국들은 이를 바탕으로 균형 있는 검토를 진행한다.”
G77 대표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정보 제공이 ‘조건’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정보가 없다는 식으로?”
“정보는 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정보는 공통 기반입니다. 그리고 ‘균형 있는 검토’라는 표현으로, 특정 방향 강제를 막습니다.”
EU 대표가 말했다. “이 정도면… 수용 가능할 수 있습니다. 단, ‘적시에’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논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논쟁은 다음 문단에서 처리합시다.” 내가 바로 끊었다. “지금은 원칙 문장을 봉합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가 잠깐 침묵했다. 그는 침묵으로 압박을 만든다. 그러나 이번엔 침묵이 길지 않았다. 그는 뜻밖에도 단 한 문장만 말했다. “시간 계획대로 갑시다.”
그 문장은 나를 편들지도, G77을 편들지도, EU를 편들지도 않았다. 대신 ‘절차’를 편들었다. 그리고 이 방에서 절차를 편드는 것은 가장 안전한 연대다. 나는 그의 그 한 문장을 들으며, 적이 친구로 바뀌는 순간이 감정이 아니라 계산에서 온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그는 오늘 내가 그를 끊었음에도, 더 큰 손해를 막는 편을 택했다. 그건 우정이 아니라 합리였다. 그러나 제5위원회에서는 합리가 곧 우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마이크를 켰다. “좋습니다. 제가 제안한 문구를 임시 합의 문장으로 기록하고, 다음 문단으로 이동합니다. 이의 없으십니까?”
몇 초. 고개 몇 개. 펜 몇 번. 그리고 아무도 마이크를 켜지 않았다. 반대가 없으면 합의다. 합의는 종종 박수 대신 침묵으로 도착한다. 나는 그 침묵이 방금 전의 균열을 완전히 메운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최소한 더 깊어지지 않게 눌러 두었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스톱워치를 한 번 흘끗 봤다. 숫자는 여전히 움직였다. 이기지 않는 문장은 완벽한 진실이 아니라, 모두가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게 하는 다리다. 다리는 흔들리지만, 건너면 된다.
나는 다음 문단의 첫 문장을 읽기 위해 종이를 넘겼다. 손끝에 종이의 마찰이 느껴졌다. 유엔의 합의는 언제나 이런 마찰 위에서 만들어진다.
(사진 출처: 개인소장)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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