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꼭 장마철의 하늘 같아서

by 산호세



가장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했던 중학교 시절에, 최선화 선생님이라고 계셨다. 국어 교사이셨는데 매사 차분하셨고 철없는 아이들 입장에서도 까다로운 면이 없는 분이셨기에 제법 인기 좋은 선생님이었다. 나에게는 공부를 일절 하지 않고도 거뜬히 80점 이상을 받는 과목이 딱 두 개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영어와 국어였다. 확실히 국어가 쉬운 과목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일종의 재능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문이나 논설문 수행평가에서는 매번 칭찬과 높은 점수를 받았고(심지어 고등학교를 자퇴하기 전에 재미로 참여했던 작문 경시대회에서는 상을 탔고 나는 자퇴하던 날 상장을 쥔 채 학교를 떠났었다), 그럼에도 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여전히, 부끄럽지만, 피동사니 능동사니 하는 개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는 그 선생님께 좋은 학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승으로서 제자를 가르치는 보람을 안겨드리진 못했으니까. 사실 그 선생님과 나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지도 모르겠다. 교사 생활하며 거쳐 온 수백수천의 학생들 중 하나에 불과하리라. 그래도 나는 선생님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에는 조용히 독서하고 계셨고, 그러다가 몇몇 문장에 연필로 밑줄 치시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나는 책을 그런 방식으로 음미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에는 독서하며 특정 구절에 감명을 받아 기록을 남긴다는 사실 자체가 특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보니 나도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


선생님이 한층 특별하게 다가왔던 건 내가 사회의 부조리와 여성주의를 접하고 나서부터였다. 난 성차별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여성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더욱 깊게 파고들고 싶다는 욕심에 페미니즘 도서를 조금씩 사들여 읽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 책을 교실에서 읽고 있었는데, 보통 학교에서 독서하는 학생은 많지 않기에 선생님이 내게 관심을 갖고 말을 건네며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자세한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 표지의 제목을 보여드렸고 선생님이 굉장한 흥미를 보이셨다.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솔직히 당시에 읽던 페미니즘 도서는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지금 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진 몰라도). 그리고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애송이였다. 지금의 나는 당연하게도 성장했지만 그때의 나는 멋모르고 으스대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는 그럼에도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똑똑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페미니즘 공부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같은 반 남자애들은 나를 보고 “너 메갈이냐”, “페미냐” 하고 놀렸지만 별로 주눅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명하게도 기울어져 있는 사회에서 여권 신장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 ‘메갈’이 된다면야(당시 메갈리아는 ‘여자 일베’ 따위의 이미지로 통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우리 국어 선생님께서도 메갈이시거든! 선생님과 나는 그 이후로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나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보호자가 생긴 기분이었다. 졸업식 날이었나, 졸업하고 얼마 지나서였나, 한 번 중학교로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평범하게 반가운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더욱 활발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붉은 옷을 입은 채 혜화역으로 걸어나갔고, 머리를 잘라 사회 통념적 여성성에 반대해 보기도 하고, 창작 활동으로 내 뜻을 펼치기도 하며 다양한 길을 걸어 왔다. 그러다가 백래시와 우울증을 겪기도 하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고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수많은 인연을 놓치고, 가라앉았다 방황하기를 반복하다 겨우 정착해서는 고작 깨달은 게, 학교에서 많이 배워둘 걸, 하는 거였다. 5월 초 언젠가 친구가 “곧 스승의 날이네” 그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선화 선생님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아직도 선생님의 얼굴, 온화한 목소리와 웃음을 기억한다. 존재만으로도 보호막이 되어 주셨던 나의 스승님.


글을 잘 쓴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살면서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국어 공부를 안 했으니 읽기 좋게 작문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과 글짓기를 좋아해서 블로그 포스트를 꾸준히 올렸다. 직접 쓴 단편 소설을 질릴 때까지 읽은 적도 있다. 요즘은 매일같이 독서를 한다. 이제 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독서가 너무 즐겁고, 왜 어릴 때 진작 독서 습관을 들이지 않았는지 후회하다가도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말자고 정신을 다잡는다.


단순히 독서와 작문에 재미를 붙였기 때문에 국어 선생님이 보고 싶어진 건 아니다. 다양한 것들, 이를테면 학문이나 예술에 파고드는 동안 느끼는 것들은 많았는데, 그걸 언어로 조립하고 문장으로 나타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에 질문을 던지고, 내가 깨달은 해답을 설명하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저 남들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목청 높여 소리소리 지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때로 남의 말을 살짝 빌려다 쓰면서 속으로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금은 구차하고 나로서는 속상한 경험이 필력에 대한 집착(열등감)을 일으킨 것 같기도 한데, 비록 지금은 어느 정도 사그라든 감정이지만, 국어를 잘하고 또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웠던 게 전부 다름 아닌 위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도 제법 오랜 세월이 흘렀다. 바로 옆 동네 그곳에 들러 볼까 싶었지만, 모교는 공립 학교이기에 선생님이 아직까지 거기서 재직하실 리 없다는 사실은 빠르게 이해했다. 나는 며칠의 조사 끝에 지역 교육청에 전화해서 ‘스승 찾기’ 문의를 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선생님 성함을 검색해 수많은 계정을 살피고 또 구글에 온갖 키워드로 탐색해 보다가 교육청에서 그런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걸 끝내 알아낸 것이다. 선생님의 성함과 내 신상, 학교명과 년도 등의 정보를 남긴 채 문의를 마쳤다. 선생님께서 퇴직이나 휴직 및 전출하셨거나, 혹은 원치 않으시는 경우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담당자 분께서 말씀하셨다. 5일 내로 연락이 없으면, 그런 거라고.


그리고 5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은 없었다. 전출이라는 가능성을 두고 타지역 교육청에 문의해볼 수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앞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으며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 할 추억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나만이 미련과 존경심을 갖고 있는데, 선생님께 간단한 안부라도 묻는 데에 실패했다면 실패는 실패로 두고자 한다. 하지만 언젠가 선생님과 인연이 닿는다면 나는 뒤늦게라도 다시 한번 당신의 제자가 될 기회를, 그리고 스승이 되어 주실 것을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쓴다는 것은 마치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처럼 끔찍하고 피곤한 작업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마귀에 씌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피곤한 작업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마귀는 어린 아기가 시선을 끌기 위해 소리를 내지를 때의 본능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도정일, 민음사(1998)



나의 모교, 여전히 또 굳건히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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