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85 [안티고네] 연습일지 1
아마추어 극단에서 연기를 한지 2년차. 연기를 정말 못하지만 잘할 필요도 없고, 아무 목표도 없이 그냥 재미있다는 것 하나로 나름 꾸준히 하는 취미활동이다.
올해 4월 "전화벨이 울린다"라는 연극 워크숍 발표회를 했는데 아무 기록을 해두지 않았던 터라, 지나고 나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이 흐릿해지면 뭔가 제대로 해봤다는 느낌보다 스쳐 지나가버린 것만 같은 기분만 남아서, 이번엔 연습 일지도 쓸겸 (나, 극단 신임 총무;) 가능한 선까지 종종 기록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4월 이후 다음 작품으로 뭘할지 희곡을 여러 개 골라 읽으면서 검토한 끝에 "안티고네"로 결정했다.
고전극이면서도 자연법과 실정법, 특이성과 보편성, 친족과 국가, 여성과 남성, 불복종과 권력 등 여러 각도로 해석될 수 있는 안티고네의 갈등은 어느 시대에서든 시사적이기도 해서 (골랐다고 하고 싶지만, 사실은 출연 인물 수가 단원의 성비, 숫자와 얼추 맞는 작품을 찾아 헤매던 끝에...;;) 선택했다.
요즘 극단 모임에선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의 개작 버전을 대조해가며 번갈아 낭독하는 중이다. 7월2일과 어제 모임 두 번에 걸쳐 돌아가면서 낭독했는데도, 아직 다 못 읽었다. 대조해서 읽어보니 두 작품의 차이가 크다. 소포클레스의 원작에서 크레온이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젖은 고루한 군주라면, 장 아누이 버전에서 크레온은 자신의 처지에서 타협적 해결책을 찾으려 애쓰고 변명하고 갈등한다.
어제 모임에선 낭독 전에 '안티고네'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각색되어 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학자 최혜영이 쓴 책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의 일부 설명을 함께 읽었다. 저자는 '안티고네'를 "문화의 시금석 cultural touchstone"이라고 표현한다. 여러 극작가들이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각색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르네상스 시대에 안티고네는 신실하고 동정심 많은 기독교적 미덕을 갖춘 여성으로 묘사됐다. 반면 라신의 작품 '라 테바이드'에서 안티고네는 하이든과 크레온 모두에게 사랑받는 연모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저자는 이를 절대왕정기였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왕이 실수를 저지르고 또 자신의 실수로 고통받는 내용의 대중극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안티고네를 철학적 명제로 부각시켰고 (헤겔의 해석은 어려워서 나중에 다시 읽기로 하고 건너뜀;;), 장 아누이 버전에서는 크레온의 경우 당시 비시 괴뢰정권의 권력자, 안티고네에게는 독일에 항전하던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모습이 투영되었다고 한다. 독일의 브레히트 버전에서는 안티고네가 전쟁과 독재에 대항하는 투사로, 크레온은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인물로,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고도 자신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경비병들은 나치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각색되었다고....
그뿐이랴. 어제 집에 와서 찾아보니 자크 라캉, 주디스 버틀러 등 걸출한 철학자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안티고네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변주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연출은 단원들에게 각자 삶 속에서 안티고네적 갈등을 느꼈던 에피소드를 하나씩 써오라고 요청했다. 단원들이 직접 겪은 삶의 경험들을 모아 각색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어제는 법조인인 막내 단원이 자신이 검사 시절에 다뤘던 무전취식 사건을 소재로 인간의 궁박한 처지와 실정법의 딜레마에 대해 발제했다.
다층적이고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한 이 작품을 우리 연출이 어떻게 각색할지가 이번 시즌의 내 관전 포인트. 나는 극단에서 내가 연기하는 것보다 연출이 한정된 공간과 사람, 자원을 갖고 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다. 지난 해 춘천 소소연극제 공연할 때도 보니 같은 작품이더라도 배우가 달라지면 연출이 캐릭터의 성격과 동선, 어조를 살짝살짝 바꿨는데, 그 소소한 변화가 극 전체를 달리 보이게 만들어 깜짝 놀랐다. 이번에도 어떤 경험을 조합하느냐에 따라 우리 연극이 '안티고네'가 아니라 '안치곤 씨 무전취식 사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