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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Jun 03. 2024

[독후감상] 당신이 옳다_정혜신

책을 읽고

0.

올해 27살 아들 녀석이 지독한 청춘의 몸살을 앓고 있다. 재작년부터 친구와 더불어 시작한 스타트업 생활이 3년 차 중반으로 접어들어 치닫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심적으로 탈진 상태에 가까운 모습이다.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 고3 시절 학력고사를 포기한 아이들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생활이 무너지고 의욕도 없어 보이고 개선의 여지도 딱히 보이지 않는 딱 그런 모습이랄까? 애비된 입장에서 밤잠 못 이루며 이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차에 마침 딱 맞는 책 한 권이 내게로 왔다.


1.

책에는 첫 장에서 공황장애 이야기로 시작한다. '누군가의 기대와 욕구에 맞춰 끊임없이 나를 지워간다는 측면에서, 또한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스 부호  같은 급전(急電)'이 '공황장애'이자 '공황발작'이라고 했다. 나는 내 아이가 틴에이저가 되어 자기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고립되어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울러 내 자신이 예전에 똑같은 모습으로 문밖에 아버지를 세워 놓고 발을 동동거리게 했던 기억도 소환되었다. 밖에서 시달리며 심신이 방전된 개인에게 자기 방 침상은 유일한 피난처이자 굳건한 요새와도 같아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봐도 그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방의 주인이 자기 영역에 누군가를 받아들일 의향도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방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연결고리는 '감정'에 기대어 벽을 사이에 두고 교신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타인(외부)에 의해 복제되고 개입되어 전파되는 이성이나 의지와 달리, 자기 부정과 소멸 상태에 있는 자에게 오롯이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 영역은 감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차포(車包) 떼고 오로지 한 발씩 다가가는 졸(卒)과도 같은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서야 한다.


2.

두어 달 전에,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를 찾았다. 검사 결과 우리 아이는 공황 장애나 발작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평균에서 벗어난 우울 증세라는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기까지 했다. 아이는 몇 번 약을 먹다가 더는 먹고 싶지 않다고 내게 말했다. 책의 저자 역시, 현대 의학에서 지나치게 약물 치료에 천착하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그건 방 안에 고립된 환자의 신경계를 이완시키고 호르몬 등의 분비를 조절하여 잠들게 만드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에 맞서 이겨내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어 무력하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살'하지 않게 할 수는 있지만, '살자!'라고 결단하게 유도하지는 못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자기를 지워버리고 싶은 지경에 처해 극도로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 편이 되어줄 누군가이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말은, 동시에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당신은 옳다'라고 주장한다. 네가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네가 정당하다라는 뜻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정도 차이가 있을망정, 모두 외롭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우울함의 바탕이 배경으로 깔린 캔버스에 그리는 하나의 그림과도 같은데, 바탕이 우울한 이유는 인간은 모두 하루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여건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한 필연적으로 인생 끝에는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분명한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기 편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고립무원의 황량한 공간에 내동댕이쳐 있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3.

아이의 편이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아빠인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다가서려 했지만, 계속 물과 기름과도 같이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반응했지만 그건 일종의 미러링이어서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겉으로만 변죽을 울리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공명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따라서 아이의 내면에서도 어떠한 치유나 공감의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자꾸만 내 질문을 회피하거나 내가 원하는 답을 일부러 꾸며서 거짓 대답을 하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에 내가 그와 같은 시기를 거쳤음을 떠올리며 최대한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질문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왔다. 왜냐하면 상대를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괴로워하는 아이의 모습에 투영된 과거 내 자신의 고통을 상대에게 투사했기 때문이었다. 책에 나오는 대로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으며,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무지와 욕심과 성급함의 소치였음을 고백한다. 나는 비록 아이에게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온화한 폭력자'의 모습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던 것이었다. 공감은 절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4.

내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나는 어느새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빠와 아들이라는 부자 관계는 절대로 상하관계가 아님에도 나는 부지불식간에 '갑'의 위치에서 아들을 '을'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도 저자가 밝히고 있는 공감의 방해물(허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첫째로 나는 다정한 수용과 단호한 거부라는 양날의 검을 지닌 <다정한 전사>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혹시라도 아이가 튕겨 나갈까 봐,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넌 지금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무언의 압력과 메시지를 취하고 있었느니 아이가 마음의 문을 열 턱이 없었다. 둘째로는 나와 아이의 감정이 중요한 연결고리인데, 나 자신이 상호 감정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고 오로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대하려 했고, 나쁜 감정은 애써 지우거나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감정은 날씨와도 같아서 선하거나 악하다고 규정지을 수 없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셋째로는 차라리 남이었으면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대할 수도 있었는데 아들이라는 밀착 관계이다 보니, 행동 변화에 대한 피드백을 너무 조급하고 과도하게 원했던 것 같다. 넷째로는 아이와 상담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 사이의 뒤틀렸던 관계가 떠오르면서 나도 같은 잘못을 아이에게 전해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곤 했었다. 아버지와 나와 아들은 모두 각자 개별적인 개체인데, 내 안에서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콤플렉스를 온전히 떨치지 못한 채 자꾸만 상황 인식에 혼선을 빚으며 지냈다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로는 요즘 이십 대들은 모두 우리 때와 비교해서 더 열악하고 힘든 청춘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집단 사고, 즉 일반화의 오류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이십 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아이만이 지닌 고유한 문제를 바라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는, 아이가 친구와 진행하는 스타트업 회사라는 외형만을 보고 비즈니스 환경이나 문제들을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었던 문제를 보였다. 시간을 내서 아이와 회사 상황이나 그 안에서 자기 능력의 한계 등으로 좌절하고 고민하는 아이의 고충을 들었어야 했는데, 나는 늘 내가 과거에 벤처 회사를 운영하며 겪었던 현장에서의 난제들을 떠올리고 그에 기대어 아이의 상황을 추론하기에 바빴던 모습을 보였다. 총체적으로 나는 공감하지 못한 가족이었고, 본의 아니게 '너는 틀리다'라고 규정짓는 '충조평판'의 폭군과도 같은 아빠였다.


5.

책을 읽고 나는 진심으로 아이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요즘 마음은 어떠니?"라고. 이전에 '하는 일은 어떠니', '친구와 사이는 나쁘지 않니', '왜 일찍 들어오지 않니', '지금 어디에 있니'와 같은 그런 껍데기 같은 얘기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아이의 안부를 묻고 살피는 자세로, 진심을 다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이의 특별하고 놀라운 얘기가 돌아왔다. "응, 홀가분해."라는. 난 아이의 방에서 돌아 나오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말의 내용에서 안도한 것도 아니라, 또한 그 아이의 기능적이고 도덕적인 의무감에서 나오는 응답에 안심한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의 편안한 울림을 느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울림에 덩달아 공명하며 나 역시 위로와 치유가 슬며시 스며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진정한 관계와 소통이 다시 열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 책으로 인해 그 가능성을 조심스러운 떨림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결론을 미리 정하고 질문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고, 비록 나와 다르지만 그렇게 다름을 지닌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것이고, 나의 내면을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을 것이고, 어렵게 마음을 여는 아이를 책망하며 2차 가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고, 계몽과 훈계라는 미명 하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며, 절체절명의 순간에 필요하다면 거짓으로라도 공감하며 아이를 살릴 것을 다짐해 본다. 내가 공감을 베풀며 치유자가 되어 아이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이가 함께 살아나며 더 크고 강건한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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