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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May 22. 2024

[독후감상] 달과 6펜스_서머싯 몸

책을 읽고

1. 작가, 경계에 서 있는 사람


"작가의 소리는 화쟁이자 회통을 위한 굿판의 사설이고, 작가는 새판에 걸맞은 샤먼이며, 그 유역은 시와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그림과 드라마 모든 예술까지 확장한다" (임우기의 비평문집,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에 대한 소설가 김홍정의 감상)


예전에 영화 <왕의 남자>를 관람하고 영화평을 쓴 적이 있었다. ( https://blog.naver.com/khanjkim/80047063813 ) 거기에서 나는 광대를 일컬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이편도 저편도 아닌 '경계'에 서 있는 메신저와 같은 존재라고 얘기했었다. 왜냐하면 광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신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대신해 천지신명에게 하소연을 대언(代言)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임우기 선생의 <네오 샤먼으로 서의 작가>에 기대어 과감하게 단언하자면, 작가는 곧 광대(샤먼)와 다를 바 없다. 소설 <달과 6펜스>를 저술한 서머싯 몸은 과연 어떤 경계에 서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홀로 남은 고아의 신분이었다. 숙부에 의해 양육되었지만 뜻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작가의 길로 접어들며 부와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심연에는 고아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초적 상실(결여)감'이 의식을 지배했으리라고 본다. 본 소설보다 4년 전에 나온 그의 자전적 소설인 <인간이 굴레>에는 내적인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서머싯 몸의 치열한 정신적 방황과 그 결말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흔들렸던 샤먼이었다.


아울러 그가 <달과 6펜스>를 출간한 1919년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해이기도 하다. 전쟁 기간에 그는 영국 MI6 소속의 스파이였다. 전쟁터 곳곳을 누비며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말할 수 없이 참혹한 현실의 실태를 직접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낭만적인 꿈(이상)은 신기루에 불과하고, 니체가 말했던 '죽어버린 신神'의 잔해를 수습하며 외줄에서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건 현실에서의 '살아남게 하는 힘(POWER)'에 대한 열망이고, 니체가 말한 초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세간에 우뚝 섰다. 1930년대에 그는 세계에서 수입이 제일 많은 작가였다.


2. 예술혼, 형언할 수 없는 암흑에너지


<달과 6펜스>에서 폴 고갱을 모델로 삼은 '스트릭랜드'라는 화가가 등장한다. 또 다른 캐릭터를 구축한 초인의 모습이다. 실제 폴 고갱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를 가졌던 스트릭랜드의 생애는, 전쟁을 겪으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광대, 서머싯 몸이 피를 흘리며 허공에 투사한 자신의 열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그가 태어났을 적 집안 형편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의 고문변호사였다. 아무리 고아였고 전쟁의 폐허에서 주검들과 빈민들의 참상의 목격자였다고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악착같은 돈벌레가 되기는 힘든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스트릭랜드는 어쩌면 외줄을 타며 내공을 쌓다가 마침내 어느 순간 천상의 경지로 초월하는 자신의 영혼을 투영하는 인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이 멀쩡하게 지내던 일상을 모두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화가의 길로 접어든 동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난해하고 판독 불가한 강력한 힘, 그가 자신의 미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부할 수 없이 이끌려 내던졌다고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현대 물리학에서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가속 팽창을 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가능해지려면 관측하거나 정의할 수는 없지만, 수학적 이론으로 분명히 실재하는 '암흑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이 에너지의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중력에 반대하여 작용하는 힘'이라고 한다. 우주가 가속 팽창하는 가설은 이미 관측을 통하여 검증되었으니, '암흑에너지'의 존재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없지는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중력에 의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듯 설명할 수 있고 심지어는 예측 가능한 행동을 준수하며 지낸다. 여기서 중력이란 이성적 판단, 욕망, 의지, 법률, 도덕, 윤리, 신념 같은 것들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인 f=ma가 사물의 움직임에 대해 명쾌하게 논증하듯이, 인간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나 목적성에 대한 풀이에도 황금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인과론'이 아닐까 한다. 즉, 모든 결과에는 그에 합당한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그 유명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야만 농부는 두 다리 뻗고 안온한 일상과 거기에서 오는 질서가 주는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혹은 자신의 경우에도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서 느닷없이 이 인과율을 위배하는 일탈이 발생하기도 한다. 자동차의 급발진처럼 평화는 깨지고 질서는 순식간에 혼돈으로 뒤바뀐다. 마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암흑에너지처럼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자기를 몰아붙여 우주 지평 너머에 있는 미지의 세계로 가속 팽창하게 만드는 것과 유사한 일들이 벌어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살면서 두 번 정도 그런 일을 경험했다. 그 유명한 '스탕달 신드롬'과도 같은 현상이었는데, 내 경우에는 그 대상이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는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이전에 알고 있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열망체가 궤도를 벗어나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혜성처럼 탈바꿈하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더 기이한 일일 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만들든 춤을 추든 결국 인지 가능한 영역과 불가해한 영역 사이를 넘나드는 네오 샤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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