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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Aug 18. 2024

[독후감상] 일방통행로_발터 벤야민

책을 읽고

- 어느 철학자의 시선과 사유


1. 들어가며

'시선'이라는 말은 눈길이 가는 방향이라는 뜻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내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나는 그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피사체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을 하는 의지의 대상이 되는 관찰체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의도가 있을 때 그 대상을 응시하거나 주시한다. 눈 뜨고 있으면 들어오는 see가 아니라, 신경을 집중해서 살피는 look at인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유대계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은 사유하기 위해 걸었다. 보통 철학자들이 산책을 하는 경우는, 인파나 소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롯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숲속 오솔길 같은 장소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는 거리에 있는 '일방통행로'를 선택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서 부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눈에 띄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상황을 응시하고 주시한 뒤 사유를 펼치기 위해서였다. 왜 그랬을까? 그가 자신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밝힌 이유를 들어보자.


"...즉 그것은 그 책에서 아이들의 놀이라든지, 어떤 한 건물이나 한 삶의 상황 등에서 나타나는 구체성의 극단적 형태를 한 시대 전체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라네..." (46p)


부분을 살펴서 전체를 가늠해 보겠다는 의도에서 나는 즉각적으로 수학계에서 소개하는 '프렉털(탈)'이라는 개념이 생각났다. 그에 따르면 어떤 도형의 작은 일부를 확대해 봤을 때 그 도형의 전체 모습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이론이 성립되고, 자연계에서는 고사리의 잎 모양이나 해안선의 모습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나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사실 내가 에세이에서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창작 정신과 맥이 닿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페이스북 소개글에 관찰-성찰-통찰을 명시하고 있다) 나는 또한 개인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슬로건이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봉준호 감독의 말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과연 발터 벤야민의 시선은 무엇을 향하고 있고, 그 대상에서 어떤 성찰_사유와 통찰이 펼쳐지게 될까?'라는 설렘을 지니고 책장을 열었다.


2. 책 소개

이 책은 모두 60편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즉 60개의 사물이나 상황(장면)이 등장한다는 말인데, 처음 기대와는 달리 어떤 것들은 쉽게 다가왔고, 어떤 것들은 난해하고 모호해서 공감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에세이스트로서 내 사유는 아직 개인이라는 세계의 범주에서 머물고 있음을 실감했고,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저자의 시선이 도달하는 거리와 깊이에는 심하게 부족함을 느끼게 함을 확인했다. 특히 내 사유는 주로 내면적 감정이나 정서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서정성에서 맴돌고 있어서, 발터 벤야민이 지향하는 시대(공간)와 역사(시간)에 관한 인식 체험으로 발전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구나, 하는 현타가 왔음을 솔직히 고백하게 된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120p)


여기서 '멂과 가까움'은 물리적, 시간적 거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지평을 의미한다고 본다. 사유의 날갯짓이 허락하는 '성찰의 영토' 끝자락에서 그는 어쩌면 섬광처럼 번쩍이는 통찰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마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의 <윤슬>과도 같고, 인간 의식이 한계 상황에 직면하여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절대자(신)의 현현으로써의 <에피파니>와도 동일한 현상이 아닐까 한다.


대중적인 예시를 들자면, 예전에 유행했던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를 말하고 싶다. 그룹 'W.H.I.T.E'가 불러서 히트했던 이 노래의 가사를 아마 다들 기억하실 것이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작사가는 주변에 온통 네모난 사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이 지나는 시대가 '뾰족하고 상처를 주는 네모난 정신이 지배하고 있지만, 사실 지구는 둥글고 사람들과는 둥글게 살아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전형적으로 부분(사물)을 가지고 전체(시대)를 얘기하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관념론을 부정하는 발터 벤야민은 오붓한 오솔길을 걷는 대신, 당대의 거리에서 통용되고 있는 사물(이나 상품) 및 생생한 삶의 현장에 시선을 보냈다. 그것은 마치 카메라로 순간을 포착하여 사진을 찍는 행위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는 뜨거운 언어보다는 거리를 두고 사색할 수 있는 이미지를 선호해서 글쓰기에 있어서도 몽타주 기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어쩌면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불친절한 방식이어서, 배경지식이나 저자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난해하게 느낄 수 있는 '일방통행식'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꿈이라는 소재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신비주의적인 관념의 허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어서, 독자들은 아주 난해한 미로에 빠진 기분이 들거나 뜬구름을 잡는다는 느낌을 가지지는 않는 문체이다. 모든 소재에서 벌어지는 사유와 이미지와 언어의 몽타주를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다가온 꼭지를 소개하자면,


1) 부채: "...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116p)

2) 마권(馬券) 매표소: "... 그래서 결혼에 있어 그 가치가 놓여 있는 곳은 부부의 비생산적인 '조화'가 아니다. 결혼의 정신적 위력은, 아이가 그런 것처럼, 부부의 투쟁과 경쟁의 별난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156p)


부채의 접힘과 펼침에서 상상력의 작동을, 경마장 매표소에서 조화로운 척하는 대신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부부 관계의 바람직한 모습을 피력하는 저자의 사유에 깊은 공감을 표하고 싶다. 비록 중간중간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마치 마른 건빵을 씹는 듯한 퍽퍽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자신도 한번 그러한 사유와 글쓰기 방식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3. 마치며

이미 밝혔듯이 발터 벤야민의 사유 방식은 독특하고 그에 따른 저술은 특이하게 다가온다. 당시에 그는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왜 거시적인 담론이나 이론이 아니라 미시적인 사유와 글쓰기를 선택했을까? 번역 작업에 참여한 최성만 교수(이화여대, 독문학)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가 비판한 것은 '정신'을 통해 계급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주의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정신지배주의(Logokratie)적 태도인데, 이 점에서 그는 이른바 '정통' 마르크시스트보다 더 과격한 마르크스시트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지향하는 실천은 직접적 정치참여, 사회참여가 아니다. 그가 생각한 실천은 지식인의 글쓰기를 통한 참여이고, 그가 촉구한 지식인의 자기반성과 이론적 작업이 정치에 갖는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고 항상 매개된 관계였다." (32p)


이를 풀어쓰자면 발터 벤야민은 게으른 관념주의를 배격하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자세를 견지한 지식인이었다. 그렇다고 정치 참여를 통한 직접적인 사회 활동을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역사에 출현했던 실학운동에서 표방한 '실사구시'와도 맥이 닿아있는 자세라고 보인다. 그는 교육 분야에, 특히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일방통행로>에 나오는 '13시리즈'에서 작가의 기법에 관한 챕터를 따로 할당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따라가지 말고 펜을 뻣뻣하게 굴릴 것. 그러면 펜대는 그 영감을 마치 자석의 힘처럼 끌어당길 것이다...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 (99p)


쉽게 얘기하자면 눈으로 읽고 사색만 하는 것은 마치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는 것과 같으며, 쓰기를 통하여 비로소 상품을 구매하여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결국 그가 자신과 독자들에게 요구한 사항은, 어디서 주워들은 어쭙잖은 지식이나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나 사상 따위를 머릿속에서 편집하여 맹목적인 언어로 배설하며 사람들을 선동해서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광기에 휘말리지 말라는 당부로 다가왔다. 그가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여 끝나고, 이후 나치즘의 망령이 온 유럽을 휩쓸었던 시대를 살았던 점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도 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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