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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Aug 23. 2024

[독후감상] 카프카 단편집_프란츠 카프카

책을 읽고

카프카를 읽었다. 누군가 그랬다.

"고전(classic) 작품이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저자를 알고 제목도 알지만, 본문은 모르는 작품"이라고.


나에게 카프카는 고전이었다.


0. 개요

사전에 알고 있는 기본 지식은 카프카는 실존주의 문학(철학)의 선구자였다는 사실 정도였다. (실존주의 문학은 1940-50년대에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대표적인 작가로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등이 있다고 한다. 카프카는 1883년에 출생해서 1924년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실존주의 문학에서 다루는 핵심 내용은 '인간 운명의 부조리'라고 부를 수 있다. 카프카의 단편들에 담긴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그런 상황에 처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모습은 어떠했을까? 세 편의 단편을 텍스트로 살펴보았다.


1. 변신: 가족 관계망 안에서의 개인

평범한 세일즈맨이었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 자기가 한 마리의 기괴한 벌레로 변신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기승전결의 구성이 없다. 하나의 사건이나 장면이 불쑥 독자에게 던져진다) 그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해결해야 하는 거액의 빚을 청산하고 여동생의 학비를 지원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실질적인 집 안의 가장이었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식충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일은 흔하다. 경제적으로 버팀목이 되던 아버지(혹은 어머니, 혹은 누군가)가 직장에서(혹은 사업제에서) 은퇴하고(혹은 명퇴하고, 혹은 망해서) 졸지에 쓸모없는 존재로 눈치를 살피는 일, 그러다가 나이 들어 암이나 치매나 치명적인 사고 후유증으로 가족들의 보살핌을 (넘어 가혹한 간병까지) 받아야 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태양계에서 조화롭게 운행되던 질서가 무너지고 행성들은 궤도를 이탈하며 혼란이 찾아오는 것과 같다. 질서의 중심이 되던 태양이 그 힘을 잃어가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혼란이 지속되면 고통받는 개체(가족 구성원)들은 새로운 질서를 원한다. 소설에서처럼 원인이 되는 요소가 제거되고(그레고르의 죽음) 대안을 찾아내야(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의 경제활동) 비로소 희망이 생기며(그레타의 신랑감 기대) 평화(휴가, 나들이)가 찾아온다. 위기에 처했던 그레고르의 가족은 결국 해체되지 않았다. 마치 세계 대전이 두 차례나 휩쓸고 지나갔지만, 인류는 아직 멸망하지 않은 것처럼. 인류가 아직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어쩌면 가족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에 와서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은 변화하고 있다. 일인 가구, 동성 부모, 장애인 주거 공간, 반려동물... 미래의 가족은 어떤 행태가 될 것이며, 거기에는 과연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고 경험했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게 했던 에너지원인 '사랑'이 여전히 태양처럼 핵융합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해진다.


2. 단식 광대: 사회 관계망 내에서의 개인

여기 한 광대가 있다. 그는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사십일 단식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하는 인물이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서커스 단원들을 먹여 살리는 데 일조를 하는(실은 주도적인 영향력을 지닌) 인싸 중의 인싸이다. 요즘으로 치면 유튜브의 먹방 스타와도 같다. 마음만 먹으면 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얼마든지 풍요롭고 행복한 날을 지낼 수 있을 법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다. 아무도 자신의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단식에 집착하며 그 행위를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는 갇힌 철창 안에서 사람들이 열광하며 구경할 때나, 그 이후 세태가 바뀌며 인기가 떨어지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때나 주변 환경과는 무관하게 항상 고독하고 우울했다. 유명 연예인들의 공황장애 현상이나, 예술가들이 겪는 '기저(만성) 우울증'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우리는 사회 활동을 하며 뭔지 모르게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생각에 젖을 때가 종종 있다. 세상에서 행복의 조건으로서의 가치들, 돈과 명예와 인기와 권력과 퇴근길 친구들과의 술자리나 자극적인 향락 속에서의 쾌감이나 미처 떠오르지 않는 무수한 그 무엇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을 느끼며, 또한 그걸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곤 한다. 사회 활동을 하며 수많은 타인(자)를 마주하지만, 자신(我) 안에 있는 진짜 자기(吾)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광대에게 '맛있는 음식'이란, 어쩌면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에너지원이 물질적인 음식이 아니라, 자기의 我ㅡ먹고 사느라 지칠대로 지친ㅡ와 吾ㅡ내면에 죽은듯이 잠들어 있는ㅡ가 합일하여 만들어 내는 궁극의 포만감(만족감)이 아니었을까, 궁금하다.


3. 법 앞에서: 운명 앞에서의 개인

한 사내가 거대한 문 앞에 서 있다. 그 문을 통하여 법(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관문이다. 문 앞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데 누구든 들어가려 하는 자를 저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누구든 들어가려고 한다면 허용해 줄 수 있다는 관용도 지니고 있다. 즉, 그 문을 통과하는 일은 들어가려고 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한, 반쯤 열린 문이다. (여기서 문득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올랐다)


주인공인 사내는 평생을 망설이기만 하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한다. 생의 마지막에서 그는 그동안 품어왔던 근원적인 질문을 문지기에게 던진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러자 문지기가 호통을 치듯 대답한다. "바보 녀석아, 이 입구는 오직 너만을 위해 있는 문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문지기는 그 문을 닫아버린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세상에 있던가? 있다. 각 개인이 지닌 목숨이다. 어느 누구도 나 대신 무덤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운명이란 말은 언제나 1과 그 자신으로밖에는 나눠지지 않는 소수(素數)이다. 여기서 자신이 아닌 다른 수, 1에 해당하는 것이 목숨이고 운명에 해당하며 소설에서의 문은 그 '1'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1은 다른 말로 '하나'이다. 목숨도 하나이고 운명도 하나이다. 그런데 그 하나가 반쯤 열려있다. 그런데도 0.5가 아니라 1이다. 문득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운동이 생각난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전자는 입자이며 동시에 파동인데, 전자가 원자핵 주변을 도는 궤도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견됐다. 원자핵(0)과 전자(1) 사이에 이론적으로는 0.(000...)1부터 0.9(999...)까지 무수한 위치 좌표가 가능한데, 관측에 의하면 전자는 오직 1의 궤도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자가 입자라면 수많은 위치 궤도가 가능하지만, 파동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파동의 처음과 끝이 딱 맞아야만 계속 파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그 현상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 나는 그 이론을 접하면서 전자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점이 너무 신기했다.


이걸 운명에 대입한다면 어떤 추론이 가능할까? '운명은 정해져 있기도 하고 동시에 정해져 있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 모호하고 기이한 명제라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다. 운명이란 선명하게 자기의 속내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새벽 기도에 나가고 사찰에서 명상을 하고 무당에 가서 사주풀이를 들어도 명쾌하게 이해되고 믿음이 생기지 못하는 대상이 바로 운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앞에서 우물쭈물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러고 살고 있는지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그렇게 삶이 마감되고, 그래서 현실은 부조리하고 그 앞에서의 실존은 늘 회의적이고 무력하게 느껴진다. 카프카는 짧은 생을 그렇게 단식 광대처럼 우울했고, 그레고르처럼 가족에게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많은 경우 허무주의로 귀결되곤 한다. 어차피 불확실한 미래고 운명이라면 인간의 의지가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관념이 신체와 정신을 지배하게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출입구가 아니라 탈출구가 필요한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앞서 말한 양자 역학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더듬어 본다.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지닌 전자는, 관측되지 않는 순간에는 파동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관측되는 순간 입자로 결정된다." 관측은 의지를 가질 때 나오는 행위이다. 만약에 소설 속 주인공이 의지를 가지고 문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운명을 관측했다면, 그는 과연 어떤 삶을 거기서 발견했을까?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운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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