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튼 소리
에릭 쿠퍼의 저서, <맹신자들>이 생각나는 밤이다.
불만 자체가 반드시 변화의 갈망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요인들이 나타나야만 불만이 민심 이반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권력 의식이다. (p.22)
희망에 부푼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권력의 원천ㅡ구호나 어휘, 심지어 단추 하나ㅡ에서도 힘을 얻는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지 않는 한, 천국왕국의 요소가 없는 한, 어떠한 믿음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p.25)
에릭 쿠퍼는 변혁(혹은 혁명)의 동인으로 '권력 의식'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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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김밥-2,000원 시대 열림
2017년 3월: 박근혜 탄핵 인용 선고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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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현재: 김밥-4,000원 시대
그때(박근혜 탄핵) 우리는 광장에 모여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을 끌어내린다는 사실에 전율했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믿음에 환호성을 질렀다. 활화산처럼 뜨거운 혁명이었다.
지금(윤석열 탄핵) 우리는 다시 광장에 집결하고 있다. 보통 시민들은 집권을 통해 혜택을 누리겠다는 권력 의식보다는 상식이 통하는 법 질서가 집행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고, 이번 혁명 이후에 김밥 가격이 첫 번째 촛불 혁명 이후처럼 속절없이 널뛰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정도여서 예전에 비하면 빙산처럼 차가운 심판을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권력 의식'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강렬한 쪽은 오히려 지키려는 자들, 극우 보수층으로 보인다. 그들은 기득권을 절대로 내려놓지 않겠다는 악착 같은 의지로 빈익빈 부익부의 미래를 영구히 고착하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의 전술은 노년층이 느끼는 자신들의 과거가 폄훼되고 있다는 상실감과, 젊은이들이 체감하는 자기들의 미래가 막막하다는 좌절감을 부추켜서 야비하게 선동하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팽배해지면 현재가 설 자리는 점점 옥죄어 들면서 탈출구를 찾게 마련이다. 궁지에 몰린다는 뜻이다. 그렇게 다급한 심정으로 이성을 잃게 된 그들 야합체는 민주주의의 법치와 상식을 짓밟으며 폭주를 하고 있다. 그걸 눈뜨고 지켜봐야 하는 일빈인들의 심정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이러다가 자칫 죽쒀서 미친 개들에게 주는 리버스 혁명이라도 벌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까지 생길 지경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 진행되는 변혁은 첫 번째 과정에서 이루지 못한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잔가지 정도를 베어버리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뽑아내는 발본색원과 환골탈태를 이룰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컴컴한 숲 속 동굴에서 숨어있던 야만이란 괴물들이 벼락불에 놀라 추악한 민낯을 보이며 백주 대낮의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쉽지는 않아 보인다. 다들 너무 지쳐 있어 보이고,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선명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로에 서 있다는 얘기이고, 풍전등화와도 같은 형국이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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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역사 속의 한 위대한 인물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오니,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능히 막을 수 있사옵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깨어있는 시민들이 열두 척의 배라면, 역사의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 빠른 속도로 명량 해협을 통과하는 물살이 되어 우리를 도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토록 지난한 싸움이 끝난 후, 남녀노소 우리 모두는 웃는 얼굴로 모여 앉아 김밥을 서로 나눠 먹는 날도 오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