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혀튼 소리

풀뿌리 민주주의

혀튼 소리

by 김쾌대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왼편으로는 야생에서 자란 풀이 보이고 오른편에는 농업으로 재배하는 작물이 있다. 땅이 단면으로 잘려져서 우리는 양쪽 뿌리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는데, 야생풀의 뿌리는 지상에서 자란 상부보다 더 길게 땅속으로 뻗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재배 작물의 뿌리는 위로 보이는 길이보다 겨우 1/10 정도도 되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사진이 합성되거나 조작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사진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무엇을 표방하고 있고 그 필요성이 무엇인지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먼저 농업으로 재배된 작물은 이를테면 대의민주주의라는 작법으로 경작된 민주주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를 수확해서 먹을 바가 아니라면 열매가 맺히는 상부에서 최대한의 결실을 맺도록 설계되어 실행된 결과물이며, 여기서는 야생과 대비하여 '최대한의 효율'이 관건일 것이다. 우리는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주권을 가진 국민이나 시민들이 시간이나 노력을 최소화하여 기술적인 도움을 받아 최대한의 수혜를 기대한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분업화가 익숙해진 근대화 이후의 개인들에게 이러한 방법은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무계획적인 야생에서의 풀을 키워내는 일은 효율적이지도 않거니와 동시에 경제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평상 시에는 문제가 없던 이러한 시스템이 위협을 받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심한 가뭄이 들거나 병충해이 피해가 극심해질 때이다. 이때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메커니즘은 상부(결실) 구조가 아니라 하부(뿌리)의 견실함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스템과 국가라는 조직체를 운영하던 법과 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위기 상황이고, 충실하게 경작을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그리하여 국민에게 수확과 풍요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던) 전문가들에게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끼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암담한 심정이다. 요즘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라도 쒀 먹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고 농업을 포기하고 다시 풀떼기를 씹어 먹으며 원시 생활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작법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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