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하고 나서 두 군데 정도 일과 소득의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잠깐 해보니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가 거기에, 그 사람들에 공헌 또는 기여할 수 있는 부분보다 장식용 조화로서의 역할이 더 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적 실업을 택했다. 잘 한 결정인지는 모르겠다.
한편으로 세상이 다 그렇거니 하고 그냥 다녀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뭐 나이 들어서까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 할 기회나 소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4 대 6 쯤으로 후자의 생각이 더 우세하였다. 그래서 좀 열악하지만 자유인으로 살기로 했고 어디 매이지 않는 삶을 택하게 된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을 안하는 대신 남는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책을 썼고,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40년 가까운 직장생활에서 축적된 지식이나 경험을 무언가의 형태로 정리할 수 있고 흔적을 남길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일 하다가 그만두고 그때 해도 되지 않느냐는 주변의 의견도 있지만 지금이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할 때라서 지금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퇴임 후에야 논문 아닌 책을 집필할 수 있게 되었고 아직 체력적으로 뒷받침이 되는 시기여서 지금이야말로 마음을 다잡아 무언가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장기간에 걸쳐 계속하여 고도로 집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 날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별로 내키지 않는 곳에서 자리를 보전하며 약간의 소득을 얻는 것에 비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을 써서 돈을 벌지는 못한다. 그래도 내가 쓴 책이라는 실물이 존재하기에 상당한 위로가 된다. 앞으로 서너 권 더 쓸 계획이다. 상업성이 없어서 누가 출판해주지 않더라도 자비출판이나 다른 방법으로 책을 만들 계획이다. 퇴직 후 달라진 것은 전공분야와 함께 인문분야도 읽고 쓰기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최근 2-3년간 인문, 교양, 사상, 역사 등 많은 책을 읽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문분야의 책도 써볼 요량이다.
요즘 내가 꽂혀 있는 말이 족적(footprint)이다. 사람으로 나서 살아생전에 무언가 족적을 남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재산을 많이 남겨 후손이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해주거나 널리 이름을 떨쳐 가문의 영광이 되도록 하는 것은, 모두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아홉 켤레의 구두’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을 남기면 그만일 것이다. 따라서 내가 쓴 글이 메모나 일기 형태가 아닌 책으로 남는 것이 필요한 듯하다.
자발적 실업 운운하면서 족적 이야기를 하여 다소 칙칙한 분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차피 사람은 이해득실로만 살지 않고 그때그때 느낌에 따라 진로나 거취를 결정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얼 택하고 어딜 향해 가든 남이 아닌 자신에게 충실하면 되지 않을까 하여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