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이야기
커버 이미지 : 아나니 중심인 카보우르 (Cavour) 광장 건물 (C) 2025.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아나니는 라치오 (Lazio) 주에 속해있는 도시로 로마에서는 남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해발 424미터에 위치한 이 도시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업의 신 사투르노 (Saturno)가 세웠다는 다섯 개의 도시 중에 하나였고 기원전 306년에 로마인들이 점령하여 로마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후 69년에는 이곳 출신의 파비오 발렌테 (35-69)가 로마 최고 정치 지도자 중에 한 명인 집정관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나니가 유명해진 것은 중세 시절 이곳 출신의 네 명의 교황들이 등장하면서 '교황들의 도시'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 (1198-1216), 그레고리오 9세 교황 (1227-1241), 알렉산드로 4세 교황 (1254-1261), 보니파시오 8세 교황 (1294-1303).
사실 아나니는 11세기부터 13세기 때까지 교황들이 머물기를 선호했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절은 영적 권한의 상징인 교황과 세속 권한의 상징인 황제가 서로의 우위권을 주장하며 다투던 시절이었고 자체적인 군대가 없었던 교황으로서는 지리적으로 황제의 군으로부터 안전한 곳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세기 교황들은 그리스도 교인이었던 북쪽의 노르만족으로 하여금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던 시칠리아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를 차지하도록 허락을 해줍니다. 가톨릭화라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지세력이 필요하였고 되도록이면 황제와 반대편에 있는 이탈리아 남부가 훨씬 좋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노르만족은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면서 교황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기 때문에, 위치적으로 로마보다 더욱 안전한 아나니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077년 '카노싸 (Canossa)의 굴욕'이라는 사건으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무릎 꿇리면서 교황권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서유럽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고 교황 칼리스토 2세 교황은 하인리히 4세와 웜스 조약을 맺으면서 주교 서임권 등 교회의 일에 더 이상 황제가 관여할 수 없도록 문서화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159년 아드리아노 4세 교황의 서거 후 알렉산드로 3세 교황 (1159-1181)이 대립 교황이었던 비토레 4세 보다 더 많은 수의 추기경의 지지를 얻으며 정통성을 확인하였지만, 빨간 수염의 프리드리히 황제는 오히려 대립 교황인 비토레 4세를 지지하며 이탈리아를 황제의 권한 아래 두기를 원하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로 3세 교황은 로마 남쪽으로 피신하여 시칠리아 왕국에 속해있던 닌파 (NInfa)에서 교황 좌에 오르게 되었고, 아나니로 이동하여 1160년에 프리드리히 황제와 비토레 4세 대립 교황을 파문하였습니다. 그리고 1176년 이탈리아 북부 도시 국가의 연합체였던 롬바르디아 동맹은 레냐노 (Legnano)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황제군을 이기면서, 다음 해인 1177년에 '베네치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며 황제는 알렉산드로 3세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웜스 조약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교황은 1179년에 라테란 3차 공의회에서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서는 참석한 추기경의 3분의 2의 표를 얻어야만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문서로 선포하였습니다. 사실 그전까지 교황뿐만이 아니라 황제나 왕으로 선출되는 것은 투표가 아닌 지지자들의 세력과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 의해서 올라가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후 아나니는 교황들의 든든한 보루가 되어주었고 이곳 출신의 네 명의 교황들은 1200년대의 교회를 이끌어가게 되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역대 교황들 중 가장 강력한 교황권을 가지며 프란치스코회와 도메니코회를 인준해 주며 새로운 수도회의 시대를 열었고,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탁발수도회라 불리는 이 두 수도회의 창립자인 프란치스코, 도메니코와 함께 글라라도 성인품에 올리며 교회 안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교황권의 추락 그리고 비록 같은 십자군이었지만 프랑스인들이 전쟁의 특수를 누리면서 새로운 힘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력 다툼은 교황과 프랑스 왕의 싸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있던 교황이 보니파시오 8세였습니다.
아나니는 역사적 사건으로 볼 때 카노싸와 대비되는 도시입니다. 카노싸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딕타투스 파페 (Dictatus Papae)'라는 교령으로 하늘 아래 교황이라는 유일한 태양이 있다는 단검론을 내세워 황제보다 자신의 우위성을 내세우며 하인리히 4세 황제에게 권력적으로 승리한 곳입니다. 아니니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우남 쌍탐 (Unam Sanctam)'이라는 교령으로 영적 권력은 위엄이나 고귀함에서 세속적 권력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프랑스의 필립 4세 왕이 보낸 사람들에게 뺨을 맞으며 수치를 당한 곳입니다.
중세 시절 교황은 종교의 중심에 서있는 영적인 지도자일 뿐만이 아니라 교회라는 국가를 지키는 왕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권국가처럼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이익에 따라 주변국과 이합집산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안에서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명문 귀족 가문들이 있었고, 이들은 가문의 영광과 이익이 되는 자신들의 교황을 배출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기도 하며 서로의 가문을 적대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서거를 하면 교황 선출 회의는 로마가 아니라 페루자나 비테르보처럼 주변 도시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교황으로 선출된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정적들이 둘러싸고 있는 로마의 라테란 대성당으로 들어가기를 꺼려 하였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 때도 이 문제는 똑같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전 교황이었던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은 1294년 7월 5일부터 동년 12월 13일까지 5개월 8일 동안 교황 좌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자보다 더한 은수자처럼 살아온 이 교황에게 행정 실무 경험이 필요한 교황의 자리는 그의 행정가로서의 무능함을 드러내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종신직이있던 교황의 자리였지만 결국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은 교회의 전통을 깨고 살아있는 동안 교황직에서 내려온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 사진 설명 : 첼레스티노 5세 교황 탄생 800주년을 기념해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이 2009년 아퀼라시에 있는 콜레마조의 성 마리아 대성당을 방문하여 첼레스티노 5세 교황 유해 위에 자신이 교황 즉위식에 착용했던 팔리움을 봉헌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을 이어 살아생전 교황직에서 사임한 두 번째 교황이 되었다. (사진 출처 : vita.it)
그를 이어 가에타니 가문의 보니파시오 8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비록 전임 교황이 사임하였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같은 하늘 아래 두 명의 교황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프랑스의 왕 필립 4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이 대립 교황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캄파냐 지방의 푸모네 성의 독방에 감금하다시피 하였고, 결국 10개월 후 90세의 나이로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은 선종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자신이 교황이 되기 위해 전 교황의 사임을 유도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직접 죽였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후에 필립 4세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공격할 때 교황의 정통성에 대한 빌미를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첼레스티노 5세 교황과는 완전히 성격이 달라, 영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행정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권위주의적인 행정가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나니 출신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친척이었고 그의 삼촌은 주교로서 교황들과 인연이 깊은 가에타니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보니파시오도 영국과 프랑스에서 보여준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판 삼아 프랑스 출신 교황이었던 마르티노 4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된 보니파시오 8세에게 주변국과 모든 왕들은 그의 교령이었던 우남 상탐 (Unam Sanctam, 하나이고 거룩한)처럼 세상 모든 만물의 구원을 위해 로마 교황에게 예속되어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1300년에 성년을 반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그리스도교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갈 수 없었고 이것은 전대사를 받을 수 없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전대사는 하느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이었고 이것을 계기로 교회의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구별 없이 모두를 로마로 즉,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들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교황은 예루살렘 대신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로마를 방문하여 순례를 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처음에는 50년에 한 번씩 1450년 이후로는 25년에 한 번씩 정기 성년을 반포하게 됩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25년으로 줄이게 되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생애 중에 한 번은 성년을 통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의미에서였습니다. 하지만 1300년이 끝나갈 때까지 그 많은 군중 속에 필립 4세뿐만 아니라 나폴리 왕국의 카를로 2세, 영국의 에드워드 1세도 이 은총을 받기 위해 로마로 오지를 않았습니다.
군주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친척과 친구들을 추기경과 주교로 서임하였고 로마 남부의 성과 땅을 사들이며 재산 증식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로마의 다른 가문들과 마찰이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미 로마 남부 지역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콜론나 가문을 지지하던 무리들이 아나니의 교황 궁으로 금화를 수송하던 마차를 가난한 자들의 피눈물이라는 이름으로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즉시 로마에 있던 콜론나 가문의 집들을 파괴해버리고 그들이 갖고 있던 권력과 특혜를 모두 무효화 시켰습니다. 그러자 콜론나 가문의 사람들은 교황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룽게짜 성 (Castello di Lunghezza)에 모여 보니파시오 교황의 선출이 법적으로 옳지 않다는 12개 조로 된 룽게짜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교황 좌에 올라 행한 모든 것은 취소되어야 하고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의 사임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속임으로 만들어진 부정이라고 공식화하였습니다. 이 두 가문의 싸움은 로마 남부에서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승리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콜론나 가문은 교황에게 용서를 청하며 파문은 면하였지만 그들의 도시였던 팔레스티나와 콜론나를 빼앗기게 되었고, 교황은 마치 고대 로마인들이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 후 카르타고의 싹을 없애겠다고 한 것처럼 이 도시들을 부수고 소금까지 뿌렸다고 합니다. 남아있던 콜론나 가문의 사람들이 파리로 달아나면서 교황의 승리로 완전히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보호 요청을 필립 4세 왕이 받아들이며 오히려 싸움은 국제적으로 커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필립 4세는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과 재정의 악화로 자신의 입지도 많이 흔들리던 상태였고 영국과의 전쟁도 임박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정 확보가 필요하였고 결국 프랑스 내 수도원과 성직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즉각 반응을 보이며 교령 '성직자와 평신도 (Clericis laicos)'를 발표하며 성직자에게 세금을 받는 평신도나 평신도에게 세금을 내는 성직자 모두 파문에 처하겠다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여기에 맞서 1301년 필립 4세는 교황의 법적 재판을 청한 주교를 체포하면서 자신의 땅에서 명령은 자신만 할 수 있고 프랑스 성직자들은 교황이 아니라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에서 성직자들이 참여한 시노드를 열어 콜론나 가문이 가져온 룽게짜 선언문을 기초로 하여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친족 등용, 성직 매매, 우상숭배 그리고 이단적인 성향 등으로 고소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각료 중에 한 명인 기용 드 노가레가 조언한 교황 체포를 받아들여, 결국 1302년 9월 필립 4세 왕은 기용 드 노가레에게 1600명의 군사를 내어주며 필요하면 무력으로라도 교황을 잡아 프랑스로 데려오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콜론나 가문도 여기에 합류하여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거주하고 있던 아니니의 교황 궁으로 향하였습니다.
아나니에서 필립 4세의 파문의 날짜를 1303년 9월 8일로 준비하고 있던 교황은 그 전날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이들에게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잡히게 되었고, 복수의 칼을 들고 그를 죽이기 위해 함께 온 콜론나 가문의 쉬아라 (Sciarra)에게 따귀까지 맞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1303년 9월 7일에 일어난 이 사건을 역사가들은 '아나니의 따귀 (Schiaffo di Anagni)'라고 부르고 되었습니다. 다행히 아나니 시민들의 저항과 도움으로 교황은 프랑스로 끌려가는 것은 면하였지만, 교황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는지 한 달도 안 되어 로마에서 선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교회의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아나니의 따귀는 로마 교황청의 쇠퇴를 시사하는 역사적 사건이었고, 이것은 곧이어 프랑스 주도의 아비뇽 교황청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였습니다. 교황이 당한 아나니의 따귀는 한 순간이었지만 아비뇽에서 70년이라는 교황청 유폐는 결과적으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긴 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프란치스코 성인이 선종한지 70년 만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개인의 회개와 교회의 회개를 외치며 하느님의 집을 고쳐세우라는 말씀을 프란치스코는 전 생애를 바쳐 알리고 실천하였지만, 아래에서 울리기 시작한 이 개혁의 외침이 당시 고위 성직자들에게까지 도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걸까요? 결국 예수님이 걱정하신 부서져가는 나의 집은 하느님의 뜻을 살려는 마음 없이 자신의 뜻을 펼치려던 사람들 때문에 다시 한번 부서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아시시는 평화의 도시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지만 아나니는 교황이 따귀를 맞았다는 장소로서의 오명과 함께 교황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