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시간 속을 거닐며 - 이미 하지만 아직

중세 수도원 이야기

by Roma Vianney


중학교 시절 성소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내게도 어떤 부르심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수도원 성소자 모임을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성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특별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부르심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절대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를 종교의 삶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마도 아주 어릴 적부터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그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바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나의 유한한 존재성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들인지,

혹시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은 아닌지,

죽음 후 나는 과연 어떤 존재로 남는 것인지,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보지도 못했던 데카르트의 존재론과 칸트의 인식론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는 이 죽음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삼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두려움은 그전부터 내 내면에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하루는 죽음이 너무 두려워 시간의 흐름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리 끝에 찾아낸 방법은 집에 있던 커다란 괘종시계의 움직이는 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시계 앞에 앉아 분침이 움직임을 눈물이 나올 때까지 주시하면서 바늘이 일 분 일 분 움직이는 것을 보며 나는 드디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았다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내 존재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시간은 세상의 것이었고 아직도 나는 세상의 시간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인들의 시간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으로

아이온 αἰών, 크로노스 χρόνος 그리고 카이로스 καιρός 이렇게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아이온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성을 나타내는 신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개념으로 1년, 1시간, 1분 등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세상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질적인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는 순간이나 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이온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만날 수 없는 영역이고, 크로노스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우리의 힘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절대자의 개입으로 아이온과 크로노스를 이어 주어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시간을 그림으로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카이로스를 신격화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누드의 모습으로 앞머리는 길고
뒷머리는 대머리이며
등에 큰 날개뿐 아니라
발목에도 조그만 날개를 가지고 있고,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카이로스 신의 모습. 토리노 박물관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자신을 ‘기회의 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신은 사람들이 자기를 빨리 알아볼 수 있도록 누드의 모습으로 다닙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쉽게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여기에 더해 뒷머리가 대머리니 낚아채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울 같은 정확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다가오는 카이로스의 앞 머리카락을 빨리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아무 때나 잡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의 카이로스 신은 기회의 때인지 망하는 때인지 분간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이 기회의 신 앞에서 사람들은 정확한 지성을 가지고 판단을 하여야 합니다.




2. 하느님의 시간


성서상에서 나타나는 크로노스의 의미도 위에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을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개념으로 ‘시간이 흐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풍경을 보면 마치 산과 나무가 내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유한한 세상과 연관된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세속 (temporalita)의 시간에 있는 것입니다. 크로노스는 바로 세상이 창조된 순간부터 만들어진 개념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변화하는 땅의 시간이고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의 시간인 것입니다.


원 (original) 시간 (tempo)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그래서 영원하다는 말을 쓰고 있고, 그 영원성의 시간과 함께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원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없는 현재만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며 이 세속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 즉 영원성 안에 있는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느님의 시간을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 베드로 2서 3,8 -


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자가 부활해서 누구와 결혼하느냐고 사두가이들이 물어봤을 때,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 마르 12,26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현재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과거의 사람들도 당신이 계시는 현재로 소명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 선조들의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 되고, 우리는 영원 속에 계시는 하느님과 동시대에 살게 되는 엄청난 일이 우리도 모르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이로스의 시간이 신약성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어느 구절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 (καιρός)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 마태 8,29 -


여기서 나오는 ‘때’는 측정 가능한 시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 계획에 따라오는 정해진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카이로스는 하느님이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는 은총의 때이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καιρός)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καιρός)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 코린토 2서 6,2 -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때이며,


"그러므로 기회(καιρός)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

- 갈라 6,10 -


회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선택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미 계획하셨지만 언제 그때가 우리 각자에게 올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수확하실 때는 결정되어 있고 어떠한 방법으로 하실 지도 말씀하십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καιρός)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 마태 13,30 -


그렇기 때문에 카이로스는 항상 하느님의 때와 우리의 결정하는 행동 사이에 있고 하느님의 시간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지를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때(καιρός)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 1,15 -


하느님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 창조 이전에 선택된 자들을 위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을 카이로스의 때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카이로스의 때가 하느님의 완전한 원의로 우리의 크로노스의 시간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크로노스)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 (카이로스)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 티토 1,1-3 -



하느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없는 영원한 오늘입니다. 그래서 우리 미래의 삶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크로노스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앞에 열려 있지만 천년이 하루 같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늘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앞에 서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오늘 안에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만의 시간이고 이 안에서 찾아오는 카이로스의 때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결정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기회인 그리스인의 카이로스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카이로스는 희망 속의 기다림이고 행동하기 위한 기다림입니다. 하느님의 ‘오늘’은 하루의 시간이지만, 우리에게 ‘오늘’은 죽는 날까지 매일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은 카이로스의 때이고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 앞에 열려있는 하늘의 문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지 마라."

- 히브 3,7-8 -




3. 인간의 시간, 그 역발상의 시작


이런 수많은 오늘 속에서 사람들은 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왜 죽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선 마치 그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좋은 답을 찾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먼저 제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질문은 단지 죽음 그 순간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이 질문은 아예 질문 거리도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은 죽음 그다음에 뭔가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직전까지가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람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시간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를 안다면 지금 내가 왜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논어 선진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제자 중 한 명이 공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 알겠는가?" 이 대답에 제자는 큰 실망을 하였고, 제자의 실망감은 내게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공자는 결국 삶도 죽음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깐요.


살면서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알아야 내 삶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시간 개념을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신앙을 통해 넓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인간의 이성만으로 이해될 수 없고 오직 신적인 이성, 즉 인간에게 주어진 신앙이라는 것으로 세상의 구세주이며 계시자이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1티모 2,4 -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죽음 이후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 만드신 것입니다. 이 계시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현재 안에서 드러냄의 시간, 즉 계시의 시간입니다.


초기 교부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 즉 하느님의 시간을 신비 (misterium)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비한 영역을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후 여러 방법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부이신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신약에서는 성자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의 하느님께서 교회와 성인과 성모 마리아를 통해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럼으로써 이 신비한 영역 (하느님의 시간)은 인간의 역사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여드릴 수도원 이야기는 신비를 드러낼 현미경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저는 세속이라는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때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며 살았던, 특히 중세 천년 (6~15세기)인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수도원의 삶을 통해 카이로스로 오시는 하느님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수도자들은 세속의 것을 선택적 의지로 포기하면서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있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시간을 미리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하지만 그 구성원인 사람은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도 있었고 다툼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선한 의지를 갖은 사람들이 나타나 새로운 방법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며 하느님께 한 발 한 발 다가간 귀중한 시간이 중세였습니다.


보편적인 규칙서로 서방 수도회의 길을 열었던 베네딕도 성인과 그의 이름으로 된 수도회들,

수도회가 세속에 너무 가까이 가려할 때 은수적인 삶을 강조하며 개혁하려 했던 수도회들,

규칙과 수도원 건물보다는 하느님의 섭리와 이웃 사랑으로 살려고 한 수도회들,

그리고 다시 초기의 베네딕도의 영성을 재조명하며 돌아가려고 한 수도회까지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적극적인 행동과 결정을 하려 했던 귀중한 중세라는 역사를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보려고 합니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복음적 단어인 “여기 그리고 지금 HIC ET NUNC”,

종말적 단어인 “이미 하지만 아직 GIA’ MA NON ANCORA”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가 있는 이 순간 (카이로스),

이미 영원한 하느님의 시간을 맛보았지만,

아직 나는 여전히 세상의 시간 (크로노스)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하느님의 시간에는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완성은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는 죽음이 피해야 될 시간 (크로노스)이 아니라, 기다리고 기다려지는 때 (카이로스) 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는 천국에서 이미 살고 있고 또 죽어 하느님의 시간 속에 살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삶의 시간은 내 존재를 풍성하게 해주는 중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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