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에 남은 내 자리

by 산토니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술을 한 잔 걸치더니 속마음을 풀어놓는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 친구는 실적도 좋고 인정받는 인재다. 그런 친구가 "나는 사실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야"란다. 회사에서 자기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다며. 그런 기대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이야기는 이랬다. 친구가 속한 영업팀은 사내에서 가장 실력 좋은 부장이 이끌고 있고, 그의 영업력 덕분에 다른 팀들과 압도적인 격차로 사업을 따오고 있다고 했다. 친구는 차장이자 팀의 허리로서, 부장이 가져온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역할을 맡아 충실히 해냈다. 부장은 친구의 능력을 높이 샀고 자기의 후계자로 점찍었다고 한다.


친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부장은 알아주는 일벌레에 술고래였다. 회사에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그는, 퇴근 후에도 영업을 위해 주 7일을 술자리에서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장이었기에 친구는 함께 일하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지만, 부장처럼, 이제 5살이 된 아들과 보내는 시간을 희생하며 일에 목매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야"


친구의 그 말 은 자평이 아니라 다짐이었다. 일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일 못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모든 힘을 조직에 쏟아부어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갈 것이냐, 아니면 일을 조금 내려놓고 피라미드 바깥의 삶에 정착하느냐. 친구는 기로에서 고민에 빠져있었다.


새삼 우리의 나이가 실감 났다. 사원, 대리 시절,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던 고민이었다. 적당히만 잘하면 피라미드 안에서 내 자리 하나쯤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피라미드는 좁아졌고, 위로 오르며, 살아남은 이들 사이에서 악착같이 내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내 자리가 남아있지 않는 날이 된 것이다.


친구의 고민에 대해 우린 한참을 떠들고 헤어졌다. 자리를 파하기 전, 친구는 일을 내려놓겠다고,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읊었다. 하지만 친구가 정말로 일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친구가 원하는 삶이 그것인지도 나는 사실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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