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을 좋아한다. 지난 8월, 도쿄의 빈티지 만년필 전문점에서 70년대 산 파이롯트 만년필을 한 자루 구매했다. 은빛 바디에 그립과 뚜껑에 검정 포인트가 들어간 심플한 디자인이다.
이 펜의 놀라운 부분은 뚜껑이 닫히는 순간에 있다. 뚜껑이 닫히는 그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에 마치 뚜껑과 바디가 서로 끌어당기는 듯, 자석의 힘으로 닫히는 것처럼 아귀가 들어맞고, 그때 '찰칵'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난다. 유난히 얇은 뚜껑의 두께 덕에 다른 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 이 펜에서만 느껴진다. 가끔은 이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펜 뚜껑을 두어 번 뺐다 꼈다 한다.
연식이 있는 펜이다 보니 조금 불편한 부분도 있다. 조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만큼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면 '펜의 본질'과 관련 있는 불편인 탓이다. 그게 무엇이냐면, 펜을 쓴 뒤 펜 꽂이에 두고 하루 이틀쯤 지나면 잉크가 나오기까지 3~5분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잉크가 나오기 시작하면 끊김 없이 잘 나오니까 펜촉이 막힌 것은 아닌데, 잉크가 나오는 길 가운데 어딘가가 낡아있는 게 아닌가 하고 짐작만 하고 있다.
잉크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펜 촉으로 종이를 긁고 있는 3분도 여전히 지루하지 않다. 내가 이 펜을 매우 아끼는 탓인 것 같다. 좋아하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보다 오래된 연식 덕인지, 뚜껑에서 느껴지는 감각 때문인지, 사각거리고 살짝은 까끌거리는 이 레트로한 필기감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좋다. 여러 불편이 있지만 나는 이 펜을 집어 들면, 오히려 얼른 쓰고 싶어서 설레고 기대감에 가득 찬 기분을 느낀다. 꼭 테니스 약속을 잡아두고 치러 가기 전의 그 설렘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무언갈 기다리는 느낌. 그만큼 좋아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