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성(內省): 나를 살피는 시간 6
5)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호곡(壺谷) 변성온(卞成溫, 1540~1614)은 모든 언행과 행동을 『소학(小學)』을 기준으로 삼았다. 당시 서하(西河)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장성(長城)에 살고, 공은 무장(茂長)에 거주하였는데, 항상 삿갓을 쓰고 도보로 왕래하며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항상 구용(九容: 유교적 예법에 따른 아홉 가지 몸가짐)을 익혀 잠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루는 길에서 소낙비를 만났으나, 걸음걸이는 여전히 무게가 있고 차분해서 평소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가 변고에 대처할 줄 모른다고 비웃자, 공은 웃으며 답하였다.
“비가 올 때에 길이 사람 사는 곳과 뚝 떨어져 있으니, 비록 빨리 나는 새라도 피하지 못할 거요. 어차피 피할 수도 못할 거면서 헛되이 내 걸음의 법도를 잃느니, 차라리 평소의 도리를 지켜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낫소.”
변성온은 말과 행동을 엄격한 기준에 맞춰 했다. 무장에 사는 변성온은 장성에 사는 김인후를 방문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무장과 장성은 지금으로 보면 15-20km 정도 되는 거리다. 그 거리를 멀다 하지 않고 의문이 생길 때마다 스승을 찾아 뵈었으니 그의 학문하는 자세를 알 만하다. 그의 행동은 예법에 어긋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나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뛴다. 옷을 버리지 않으려 허둥대다 보면 옷은 옷대로 젖고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빠진다. 인생에서 때로는 피할 수 없는 비를 맞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비에 젖느냐 안 젖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비를 맞느냐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융통성 없는 태도를 비웃었다. 하지만 변성온의 답변은 인상적이다. 어차피 인가는 멀리 있어 비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평소의 태도를 지키겠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도 비루하게 굴지 않고 당당히 맞이하겠다는 순명(順命)의 자세다.
문절공(文節公)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마음이 매우 확고하여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낯빛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제주에서 북쪽으로 옮겨갈 때에 큰 바다에 들어가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일어나 동행한 세 척의 배가 이내 침몰하려 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목 놓아 통곡하였다. 공은 낯빛이 태연하더니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가서(家書)를 써서 죽은 뒤의 일을 처리하고, 또 하인에게 말했다.
“배가 비록 전복되더라도 다행히 한 사람이라도 탈출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편지를 나의 부모님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잠시 뒤에 바람이 그쳐서 겨우 화를 면했다. 후일 그의 편지를 보니 글자의 획이 모두 훌륭하고 재산 처리가 빈틈없이 상세하여 모두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유희춘은 어떤 위급한 상황이 오더라도 낯빛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배를 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할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넋이 쏙 빠져 통곡했다. 하지만 유희춘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집으로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써 내려갔다. 편지를 다 쓴 뒤 하인에게 전달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비바람은 잦아들고 배는 침몰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의 편지를 보니 글씨는 단정하고, 재산 처리를 꼼꼼히 적어 빠뜨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 삶의 시간들이 증명되고, 평생의 공부가 확인된다. 예기치 않은 죽음이 명료하게 다가올 때, 어떤 자세로 그 죽음을 맞아야 할까? 시사여귀(視死如歸) 곧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글씨가 평소처럼 흔들림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죽음의 순간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희춘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준 셈이다.
정헌공(貞憲公) 임권(任權) 판서는 자제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게 어찌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겠느냐? 다만 두 가지만 지켜왔을 뿐이니, 홀로 있을 때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자랑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임권은 자식들에게 자신은 뛰어난 재주가 없고 두 가지만 지켜 왔다고 말한다. 혼자 있을 때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고 남들과 있을 때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세상에 혼자 있을 때 스스로도 속이고, 남들과 있을 때 허세와 허풍을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SNS는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한 경연장 같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다 보니, 끝내 스스로조차 속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임권의 단순한 두 가지 원칙은 복잡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