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2. 내성(內省): 나를 살피는 시간 7

by 박동욱

6) 바람을 기다리지 않는 새처럼

항재(恒齋) 정종영(鄭宗榮, 1513~1589)은 권세에 아부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시를 지어 아름답게 여겼는데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이 있었다.

“붉은 봉황은 높이 날아 바람을 기다리지 않는다.[丹鳳高飛不待風]”

상국(相國) 노수신(盧守愼) 또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윤원형이 정사를 어지럽히던 때에도 명예와 절개를 더럽히지 않았으니, 참으로 쇠처럼 단단한 마음과 돌 같은 창자로다.”



정종영은 4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총 47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였다. 1551년과 1552년에 ‘염근(廉謹, 청렴하고 삼가는 관리)’으로 선발되었다. 사관은 ‘윤원형(尹元衡)의 첩(妾)과 숙질(叔姪)이 되는데도, 오히려 윤원형에게 붙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였다’고 하고 있다. 윤원형의 첩이 바로 정난정(鄭蘭貞)이었다. 윤원형은 명종 즉위 후 권세를 잡았다. 정종영은 이러한 인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았다.

관료들은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해 없는 끈도 닿아 보려고 애쓴다. 그런데 정종영은 무엇보다 단단한 끈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런 그를 두고 조식은 “붉은 봉황은 높이 날아 바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라 평했다. 고결한 봉황은 더 높이 날아서 바람의 덕을 보려 하지 않는다. 외부의 조건을 기다려 비상(飛翔)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 날아보겠다. 또, 노수신은 정종영을 철석 같은 간과 창자라고 했다. 소식(蘇軾)이 썼던 말로 강직한 사람을 가리킨다. “짧은 인생 누구에게 빌붙어 얻는 권력은 필요 없다. 나답게 살다가 나답게 가겠다.”



이국필(李國弼)이 퇴계 선생께 여쭈었다.

“어떤 이가 ‘청하다’는 뜻의 ‘구(求)’자는 나쁜 의미만 있고 선한 뜻은 없다 하더이다. 과연 그러합니까?”

퇴계 선생이 답하셨다.

“높은 뜻을 품고 굳은 절개를 세우고자 하는 선비라면, 마땅히 그 어떤 사람의 말을 첫째가는 가르침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구(求)’란 글자는 구한다는 의미로, 주로 내 안에 없는 것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남에게 자리를 구하거나 인정을 구하거나 이익을 구한다. 그러니 이국필은 “‘구(求)’자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보하고 있으니 긍정적 의미는 없는가?”라고 퇴계 선생께 물었다.

퇴계 선생의 답변은 그 사람의 말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구(求)’를 악하다고 말하는 그 주장이 맞다. 그것을 첫 번째 경계로 삼으라.” 선비는 남에게 무언가를 구하려는 마음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리를 구하고, 이익을 구하며, 명예를 구하는 순간 선비의 기개는 꺾인다. 퇴계는 ‘구(求)’의 긍정적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아예 ‘구하는 마음’ 자체를 끊어버리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계곡만필(谿谷漫筆)』에서 말하길, "남의 도움 없이는 서지 못하는 자는 어린아이 같고, 다른 것에 붙어야 자라는 자는 덩굴풀 같으며, 상황 따라 모습을 바꾸는 자는 그림자와 망령 같고, 남의 것을 훔쳐 이익을 보는 자는 도둑 같으며, 남을 해치고 자신만 살찌우는 자는 승냥이와 이리 같다. 사람이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가까워지면 군자에게 버림받고 소인의 무리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상사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아이’, 권력에 줄을 대는 ‘담쟁이’, 수시로 말을 바꾸는 ‘그림자’, 남의 성과를 도둑질하는 ‘도둑’,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는 ‘승냥이’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빌런’들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아류가 되어 손쉽게 성취를 얻고 싶고, 다른 이의 보호막에 숨어 안락함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자기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그와 단절하고 넘어서야 하는, 이른바 ‘젖을 떼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유(離乳)는 고통스럽지만 한 단계 높이 오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나이가 들어도 어른이 못되고 어린아이에 머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퇴계(退溪)의 도산정사(陶山精舍) 아래에는 어량(漁梁)이 있었는데, 관청의 금지령이 매우 엄격해 사사로이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선생은 더운 여름이면 반드시 계곡 가까운 집에 머물렀으나, 한 번도 그곳(어량)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이를 듣고 웃으며 말하길, “어찌 그리 지나치게 조심하는가? 내가 스스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니, 비록 관청의 어량이 있다 한들 무엇을 꺼리고 무엇을 피하겠는가?”

이에 퇴계가 답하길, "남명에게는 저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나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네.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써 유하혜(柳下惠)의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



퇴계와 남명은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수장이다. 두 사람은 같은 영남 출신에 나이도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만나려면 만날 수 있었지만, 서로 만나려는 의지나 시도가 없었다고 보인다. 두 사람은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남명과 퇴계는 학문관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남명은 허형(許衡)을 따라서 천리지학(踐履之學)을 중시했다면, 퇴계는 주자를 따라서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중시했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다. 남명과 퇴계의 평전 모두에서 두 사람이 상호 존경하는 사이였음을 밝히고 있지만, 두 사람은 결코 섞이기 힘든 물과 기름같았다.

예를 들어 여색에 빗대어 설명해 보자. 퇴계가 아예 여자가 있는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남명은 여자가 있든 없든 자신의 할 도리만 지키면 된다고 했다. 나중에 남명이 퇴계의 지나친 조심성을 탓하자, 퇴계는 각자의 길이 다르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매거진의 이전글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