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3. 환택(宦澤): 공직자가 지켜야 할 것들 6

by 박동욱

5) 욕심을 비우면 두려울 게 없다

최윤덕(崔潤德)이 이상(貳相)으로서 평안도 절제사와 안주 목사를 겸임할 때였다. 공무가 한가할 때 관청 뒤 빈 땅에 오이를 심고 손수 호미질하고 있었다. 소송할 일이 있는 사람이 왔는데, 그가 공(최윤덕)인 줄 몰랐다. 백성이 물었다.

“대감님은 어디 계시오?”

공이 속여서 말했다.

“저쪽에 계시네.”

그러고는 (관청으로 들어가) 관복으로 갈아입은 후, 정식으로 소송을 처리했다.


최윤덕은 이상(貳相)이었다. 이상은 ‘좌ㆍ우찬성(左右贊成)’을 달리 이르던 말이다. 삼정승 다음가는 벼슬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평안도 절제사와 안주 목사를 겸임했다. 위세를 떨려면 얼마든 떨 수 있었지만, 그는 자투리 시간에는 농부처럼 밭일을 하였다. 최윤덕을 찾아온 백성은 그를 그저 농군인 줄 알고 최윤덕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권력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뇌를 바꾼다고 한다. 그만큼 권력을 가지면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권위 의식과 특권의식에 쩔기 쉽다.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은 따로 있다. 남이 떠받들어 주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높아지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조심해야 한다. 스스로 변하기도 쉽지만, 나를 보는 시선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익성공(翼成公)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회(公會)가 열렸는데, 공조판서 김종서가 공조 관원들에게 명하여 간소한 술과 과일을 준비해 황희에게 올리게 했다. 이에 황희가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나라에서 의정부 옆에다 예빈시를 둔 것은 삼정승을 위한 것이니, 만약 음식이 필요하면 예빈시에서 가져오게 할 것이지, 어찌 감히 공조에서 마음대로 음식을 마련하는가?”

황희는 이 일을 임금께 아뢰려 하자, 여러 대신이 힘써 말려서 그만두었다. 그러나 결국 김종서를 의정부 뜰로 불러내어 꾸짖었다.

후에 정승 김극성이 경연에서 이 일을 임금께 아뢰며 말했다.

“대신이 이와 같이 규칙을 지켜야 비로서 조정을 엄숙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영의정 황희를 위해 공조판서 김종서가 술과 과일을 올렸다. 황희는 김종서에게 몹시 화를 낸다. 삼정승의 음식을 대는 부서는 예빈시이지 공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조가 예산과 인력을 써서 정승을 접대하는 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지만 황희는 작은 틈이 거대한 둑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오는 특혜가 규정에 어긋난다면 서릿발처럼 쳐내는 단호함이 황희의 신화를 만들었다.

요즘은 어떠한가? 법카와 업무추진비 등을 해괴망측하게 사용한다. 제 돈을 주고는 절대 먹지 않을 음식과 물품을 마구잡이로 써댄다. 나랏돈 무서운 줄 모르고, 제 가욋돈 정도로 여긴다. 공적 마인드가 탑재되지 않은 공직자들의 모습이다. 황희의 사례를 지금에 적용하면 총리가 장관의 규정 위반을 야단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풍경을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응교(應敎) 이필행(李必行)이 고을 수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물고기와 게에 대한 세금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감면해 주지 않았으면서도, 은혜를 베푸는 듯이 말하였다.

“이 세금은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니, 마땅히 후임 관리들과 함께 지켜야 할 일이오. 내가 스스로를 꾸며 명예를 낚는 짓은 하지 않겠소.”



세금 감면은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이 가장 환호하는 정책이다. 수령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임기 중에 세금을 감면해줘서 선정을 베풀었다는 칭송을 듣고 싶을 수 있다. 말 그대로 포플리즘(Populism)의 유혹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분별한 세금 감면이 훗날 후임 수령과 백성들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돌아올 수 있다. 그때 가서 후임자는 뒤늦게 세금을 부과하면서 전임자가 먹어야 할 욕까지 한꺼번에 먹게 된다.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에 눈을 감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필행은 당장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행정의 일관성을 택했다.






재상 오겸(吳謙)이 남원부사로 재임할 때, 온 고을 백성들이 그의 은혜에 감동하여 비석을 마련해 두고 그가 떠난 후에 글을 새기려 했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 원로들을 속여 말하였다.

“내 정사가 어찌 비석을 세울 만합니까? 무릇 비석의 글을 실적과 맞아야 후세에 믿음을 받을 수 있소. 내가 떠나기 전에 비문을 쓰면, 내가 좋다 하면 좋은 것이 되고, 안된다 하면 안 되는 것이니 내가 바로잡을 수 있소. 그대들은 비석을 실어 오시오. 내가 친히 가서 살펴보겠소.”

원로들이 그 말을 믿고 비석을 들고 오자, 공은 원로들을 물러나게 한 뒤 석공에게 하마(下馬) 두 글자만을 새겨 향교 앞에 세우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분수에 맞고 절도 있는 처사를 관리의 품위에 맞는다고 칭송했다.


거사비(去思碑)는 선정을 베푼 감사나 수령이 떠난 뒤에 그들이 재임했을 때의 공덕을 기리어 고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공덕비(功德碑), 불망미(不忘碑), 선정비(善政碑) 등으로도 불린다. 거사비의 취지는 원래 참으로 아름다웠다. 전임 수령의 공적에 감사한 백성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금해 자발적으로 빗돌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탐관오리들이 자신들의 공적을 꾸며대기 위해 백성들을 들볶아 억지로 세우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의 입에다 빗돌(口碑)을 새겨야지 차가운 짱돌에 새겨서야 되겠는가?

오겸은 빗돌에 낯 간지러운 칭송 대신, 하마(下馬)라는 딱 두 글자만 새기도록 했다. 그저 이 빗돌을 보면 말에서 내려서 땀이나 식히고 가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오겸은 빗돌에 이름을 지우는 대신에 아름다운 일화를 사람들의 기억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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