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3. 환택(宦澤): 공직자가 지켜야 할 것들 5

by 박동욱

4. 내 식구에게 더 가혹하게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이 되어 의정부를 담당하였다.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관원의 후보자를 선출하여 기록한 명부)을 권점(圈點)을 하던 중, 그는 붓으로 자신의 아들인 덕열(德悅)의 이름을 지워버리며 말했다. “내 아들이 옥당(玉堂)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네.” 사람들이 모두 그 사심 없음에 감복하였다.



이준경은 영의정이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든든한 뒷배가 될 만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준경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작성된 명단에서 오히려 아들의 이름을 빼버렸다. 오늘날 아빠 찬스란 말이 판을 치지만, 자기 스스로 아빠 찬스를 발로 차버린 셈이다. 자격이 없는 자리에 오르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이준경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능력이 없으면 그 자리를 감당치 못할 것이고, 능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아버지 후광이 없이도 떳떳하게 그 자리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식에게 더욱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공직자의 윤리이자 진짜 자식 사랑이었다.




김시양(金時讓) 판서가 명을 받들어 영남 지방을 순행하던 중, 한 고을에서 기한을 어기는 잘못을 저지르자, 그 향소를 잡아 왔다. 형틀에 묶어 놓고 볼기를 드러낸 채 곤장을 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한 사람이 달려들어 자기 몸으로 향소를 덮었다. 그는 다름 아닌 김판서의 사위 이도장(李道長)이었고, 그리고 형틀에 묶여 있는 그 향소가 바로 도장의 숙부였다.

이에 김시양 판서는 꾸짖으며 말했다.

"어찌 사위 하나 때문에 국법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판서가 나졸들에게 명하여 사위를 끌어내게 하고, 이에 곤장을 쳤으니 판서 김시양이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이도장은 일찍이 판서를 지낸 이원정과 대사헌을 지낸 이원록의 부친으로서 한림과 옥당을 거쳐 당상관에는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



김시양이 어느 지방에서 겪은 일이다. 잘못을 저지른 향소(鄕所)가 있어 곤장을 치려고 하는데, 김시양의 사위인 이도장이 달려와 집행을 막아섰다. 향소는 이도장의 숙부였다. 어찌 보면 이도장의 행동이 당연해 보인다. 눈앞에서 자신의 숙부가 곤장을 맞게 생겼는데 조카가 가만히 방관만 하는 것도 이상해 보인다. 그렇지만 김시양은 사위를 꾸짖고 그대로 향소에게 곤장을 치게 했다.

사위의 숙부라면 사돈 중에서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사위의 체면을 봐서라도 눈 한번 질끈 감아 버리고 훈방 조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시양은 공적인 일 처리에서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공직자가 친인척과 측근의 문제에 눈을 가리는 순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공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사적인 관계를 돌아보지 않는 엄중함이 필요하다. 당사자의 야속한 마음이야 사후에 개인적으로 어루만져주면 된다.






이청련(李靑蓮) 이후백(李後白)이 이조판서로 재임하며 공정하고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비록 친족일지라도 자주 찾아와 문안하면, 그것을 크게 꺼렸다.

하루는 먼 친척이 찾아와 이야기 중 관직을 구하는 뜻을 드러냈다. 이후백이 작은 책자를 보여주었으니, 거기 기록된 사람들의 이름은 바로 장차 관직을 제수(除授)할 후보들이었고, 그 먼 친척의 이름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였다.

“애석하도다! 그대가 만일 이런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마땅히 관직을 얻었을 것이오. 관직을 청탁해서 관직을 얻는다면 공정한 도리가 아니오”

그 먼 친척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이후백은 인사 업무에 실수가 있을 때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내가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자책하니, 사람들이 이후백의 공정한 마음은 근세에 견줄 만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후백은 이조판조로 있을 때 일가 피붙이라 할지라도 자주 찾아오는 것을 꺼렸다. 공직자에게는 순수한 방문인은 없고 민원인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찾아와서 벼슬이라도 한자리 얻으려고 구차한 말을 늘어놓았다. 원래는 관직에 제수될 유력한 후보였으나,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공직자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후보군에서 탈락시켰다. 이후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잘못된 인사를 하게 되면 나랏일을 그르쳤다며 심하게 자책했다.

그가 이처럼 인사를 중시한 이유는 분명하다. 인사가 만사다. 줄을 잘 서거나 손바닥을 비벼서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자신과 알음알이가 있다고 친한 사람만 뽑았다가는 나라든 조직이든 엉망이 된다. 특히 나랏일은 친목 모임이 아니다. 역량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반대 성향이라도 사적으로 소원한 사이라도 중용해야 한다.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공직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찬성(鄭贊成) 종영(宗榮)은 선조 때의 명신으로, 청렴하고 깨끗한 지조를 시종일관 지켜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되었다. 그가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거리를 지나가면 수십 명의 아이들이 줄지어 절하며 말했다.

“저희는 큰 솥을 바친 사복(司僕)의 자식들입니다. 대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삼가 절하옵니다.”

이런 일이 수십 곳에서 발생하자 정공은 이상히 여겨 친지들에게 두루 물어 그 이유를 알고자 했다. 한 사람이 알려주었다.

“세간에서는 공께서 무인(武人)으로부터 큰 솥 한 개를 뇌물로 받고 그를 사복(司僕)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이 소문을 듣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정공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무인을 사복으로 임명한 것은 실은 누이가 청탁했기 때문이었다. 누이는 그 무인이 자기 남편 집안의 친척이라 했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후에 더 조사해보니, 누이는 정말로 그 무인에게서 큰 솥을 받고, 남편의 친척이라고 속였던 것이었다.

세상에서 “아무개가 아무개에게서 뇌물을 받고 어떤 관직을 주었다”는 말은 비록 모두 사실이 아닐지라도 반드시 그런 말이 생겨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남을 논하는 자는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되며, 비방을 받는 자는 스스로를 살피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그 비방을 모두 자기를 모함하는 것이고만 여겨서도 안 된다.

유리솥(伐羅)은 유철(鍮鐵)로 만든 큰 솥의 이름이다.



정종영(鄭宗榮)은 알 수 없는 말로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는 일을 당해서, 그 연유를 알아보았다. 그가 무인(武人)으로부터 큰 솥을 뇌물로 받고 사복(司僕)에 임명해서 아이들이 그 일을 가지고 놀렸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누이가 어떤 사람을 자형의 친척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청탁을 들어준 일이 떠올랐다. 무인은 누이와 상관없는 인물이었고, 누이가 그 사람에게 큰 솥을 받고서 남편의 친척이라고 둘러댄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정종영은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대개 떠도는 소문은 사실인 경우가 더 많다. 뇌물은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 단둘만 아는 일이라고 해도 결국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마련이다. 그 유명한 양진(楊震)의 사지(四知)란 고사가 있다. 왕밀이 와서 뇌물을 주려 하자 양진은 뇌물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지금은 한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天知), 귀신이 알고(神知), 내가 알고(我知), 자네가 아는데(子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라고 하였고, 왕밀은 그 말에 부끄러워하면서 떠났다.

대개 소문은 뇌물을 준 쪽에서 흘러나온다. 정종영의 누이가 뇌물을 받았지만, 분별없이 청탁을 들어준 대가로 뇌물을 받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일가의 청탁을 받아주어서 본인의 명망에 흠이 갈 일을 만들었다. 청탁이나 뇌물은 거절하기 어렵고, 보안도 유지되지 않는다. 애초부터 청탁과 뇌물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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