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환택(宦澤): 공직자가 지켜야 할 것들 4
3) 잘못된 관행을 부수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세 여자 무당이 요사스러운 신을 받든다 하며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이들은 합주(陜州)에서 출발해 여러 고을을 돌며, 도착하는 곳마다 공중에서 은은히 ‘길을 비켜라’는 사람 소리를 내었다. 이를 들은 백성들은 앞다투어 제물을 차리며 감히 뒤처지지 않으려 했다.
안공(安公)은 단호히 무녀들을 매질하고 감금했다. 무녀들이 신의 말씀이라 핑계 대며 재앙과 복으로 위협했으나, 안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며칠 후 무녀들이 애걸하며 용서를 빌자 풀어주었고, 이로써 그 요사스러운 미신은 완전히 사라졌다.
세 여자 무당이 이상한 술법을 써서 사람을 현혹시켰다. 사람들은 무당들이 신기한 능력이라도 갖고 있다고 믿어 그들을 받들어 모셨다. 안유는 주저하지 않고 무당들을 매질하고 감금했다. 무당들은 안유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란 저주도 서슴지 않았지만, 안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당들이 잘못을 빌자 그제야 무당을 풀어주었다. 관리를 협박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것처럼 허세를 부리다가, 관리에게 백기 투항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 무당 따위는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공포는 뻔히 보이는 현실마저 왜곡한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사교(邪敎)에 빠져 자신과 가족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믿을 만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을 믿을 뿐이다. 길을 찾으라고 포교하는 길거리 도인들의 눈빛은 이미 길을 잃은 사람들의 눈빛이다. 지금도 여전히 무속의 망령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성종 임인년에 개령현의 백성이 밭을 갈다 오래된 석불을 발견해 밭둑에 놓아두었다. 우연히 병으로 골골하는 사람이 와서 불상에 절하자 병이 낫자 드디어 영험하다 여겼는데, 어떤 사람은 불상에서 빛이 난다고까지 했다. 이로 말미암아 인근 고을 사람들이 달려와 남녀가 뒤섞여 있었는데 쌀과 베와 지전이며 향과 초, 꽃과 과일 등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승려가 와서 향화를 맡아보고, 시주자가 있어 기와집을 지었으며, 또 큰 사찰을 지으려 했다. 양반의 부녀자들까지 직접 와서 기도했으며, 개령현감과 금산의 훈도마저 병이 나는 일이나 자식 얻기를 빌었다. 금산군수 이인형이 이 소식을 듣고 곧장 유생과 이졸(吏卒)을 보내 승려를 잡아 오게 하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모든 것은 우연에서 시작했다. 백성이 우연히 밭을 갈다 발견한 석불을 밭둑에 놓아두었을 뿐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그 석불을 보고 절을 하자 또 우연히 병이 나았다. 또 어떤 사람은 불상에서 빛이 난다고까지 했다. 우연과 착시가 겹치자 그저 돌로 만든 부처는 신령스러움이 더해지고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석불을 숭배했고, 이 기회에 편승하여 승려는 시주를 받고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양반의 부녀자들이나 관리들까지 제 소원을 빌기 위해 찾아왔다. 군수가 이 소식을 듣고 승려를 잡아 오고 시주하는 사람들은 쫓아버렸다.
종교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신도가 확장되며 종교 사업이 만들어지는지가 이 짧은 글에 다 담겨 있다. 지금의 종교들은 온통 기복(祈福)으로 넘쳐난다. 법륜 스님은 기도와 기복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도는 바깥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는 일이고, 기복은 지금 없는 것을 이루어달라고 떼쓰는 일이다. 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지, 나를 위해 세상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지 않는가?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동생 허척(許倜)은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라 이품(二品) 벼슬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지평(持平)을 지냈다. 세종(世宗)이 말년에 부처를 받드는 일을 꽤나 많이 해서 절에서 직접 기제(忌祭, 기일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 했다. 허척이 간곡히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자, 과감히 관청 소속 사람들을 이끌고 가 이미 준비된 제수(祭需)를 모두 부수어 제사를 저지하였다. 이후 왕의 노여움을 피해 숨었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이 종교에 깊이 빠져 나라를 그르친 사례는 너무나 많았다. 세종도 말년에 불교에 깊이 빠져서 기제사를 절에서 지내려고까지 하였다.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은 일이다. 허척은 왕에게 간곡히 간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사람들을 데리고 가 제수(祭需)를 박살을 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충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세종은 허척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다. 신하의 과격하다면 과격한 행동을 보고서, 국왕이 신하를 처벌하지 않고 근신의 계기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