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4. 해분(解紛): 꼬인 매듭을 푸는 지혜 1

by 박동욱

1) 지혜로운 판결 (明斷)

고려 손지추(孫知樞) 변(抃)이 경상도의 관리들을 감찰하던 때, 아우와 누이가 서로 소송을 하였다.

아우가 말하였다.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남매인데, 어찌 누이만 홀로 부모의 재산을 차지하고 아들은 그 몫이 없습니까?”

누이가 대답하였다.

“아버지가 임종 직전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에 온 집안 재산을 나에게 주셨고, 네가 얻은 것은 단지 검은 의관 한 벌, 짚신 한 켤레, 종이 두 장과 계약서 하나뿐이다. 아버지의 계약서가 모두 남아있으니 어찌 어길 수 있겠느냐?”

소송이 여러 해 동안 판결이 나지 않자, 손변이 두 사람을 불러 물었다.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는 살아계셨느냐?”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너희는 그때 각각 몇 살이었느냐?”

“누이는 이미 시집갔고, 아우는 겨우 어린아이였습니다.”

손변이 판결을 내렸다.

“부모에게 아들과 딸은 같은 법이다. 장성한 딸에게 후하게 대하고 어린 아들에게 박할 리가 없다. 아버지는 아들을 누이가 제대로 돌보지 않을까 염려하셨을 것이다. 아들이 장성하면 이 종이로 소장을 쓰고, 검은 의관을 입고, 짚신을 신고 관아에 호소하라. 네 가지 물건을 남긴 뜻이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깨달아 서로 울며 화해했고, 손변은 재산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애초에 딸과 아들은 똑같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장자상속이 확립되었다. 누나와 동생이 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누나에게 재산 전부를 주고 아들에게는 옷 한 벌, 짚신 한 켤레, 종이 몇 장이 전부였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차등이 있을 리 없을 텐데도, 정확한 문서가 남아 있으니 판결을 내리기 어려워 소송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손변이 사건을 맡으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아버지가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따져보았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유서 작성을 놓고 고심했을 것이다. 젖먹이 아들에게 재산을 주자니 딸 부부가 재산을 다 갖겠다고 해코지할까 두렵고, 안 주자니 아들이 굶어 죽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니 거짓 유서로 재산은 딸에게 다 줄 테니 아들은 키워만 달라는 무언의 거래를 한 셈이다. 그리고는 소소한 물품만 남겨 두는 것으로 훗날 송사를 하라는 암시를 남긴 것으로 보았다. 어찌 보면 꿈보다 해몽이 더 좋지만, 이런 해몽이라면 꼭 나쁘지만은 않다. 손변은 유서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행간에 숨겨진 아버지의 공포와 사랑을 읽어냄으로써, 남매 사이를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명문가의 형제가 크고 작은 가마솥을 서로 차지하려고 관청에 소송하였다. 함공이 노하여 아전에게 급히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가져오라 하며 말하였다.

“깨뜨려서 무게를 맞춰 나누어 주겠다.”

두 사람이 깨닫고, 소송이 드디어 끝났다.


마치 솔로몬의 재판을 보는 듯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가마솥의 소유권이 아니라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이다. 형제는 고작 솥 하나에 눈이 멀어 형제애를 잃어버렸다. 함우치는 누구의 것이 맞느냐를 따지는 지루한 법리 논쟁 대신에 갈등의 원인이 되는 대상 자체를 파괴하겠다는 충격 요법을 사용한다. 솥을 깨버리면 누구도 이득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제야 형제는 정신을 차린다. 솥은 깨지지 않았고 깨진 형제의 마음은 다시 붙었다.






기묘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고, 돌아오는 길에 종루 앞에 이르러 길가에 늘어서서 있다가, 어떤 문인의 유건(儒巾)을 빼앗아 찢으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부자(父子)가 한 여자와 간통한 자이니, 우리 무리에 끼일 수 없다.”

하니, 그 사람이 통곡하며 돌아가서 다음날 사헌부에 호소하였다.

당시 정암 선생이 대사헌으로서 그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이 일이 밝혀지는 것은 너에게 달렸을 뿐이다. 오늘 이후 네가 만일 몸가짐을 단속하여 스스로 수양하고 선한 사람으로 알려지면, 지금 비록 해명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앞선 말은 모함이었다고 할 것이니라. 네가 만일 행실이 나쁘고 선하지 않은 사람으로 알려지면, 지금 비록 해명되더라도 사람들이 앞선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니라. 그러니 해명되느냐 아니냐는 오직 네게 달려 있느니라. 너는 힘쓰도록 하라.”

그 사람이 이마를 조아리며 절한 뒤 나갔다. 그 후 고을 전체가 과연 그를 간통한 일로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논하는 자들이 말하였다. “공의 이 판결은 의심스러운 일을 처리하는 방법과 사람을 선하게 권면하는 방법, 두 가지를 모두 얻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부자간에 한 여자와 간통했다는 모욕을 당했다. 이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라, 누군가 악의적으로 고약한 소문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조광조는 이 사실을 호소하러 온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한다. 이 일의 진위 여부는 너의 몸가짐에 달려 있다. 지금 아무리 진위를 가리려고 해도 진위는 가려지지 않고 남의 입방아에 더욱 오르내릴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몸가짐을 잘한다면 그런 소문은 자연스레 잦아들다가 헛소문이 되겠지만, 앞으로 몸가짐을 형편없이 한다면 소문이 실제처럼 바뀌게 된다.

“말로 싸우지 말고 삶으로 증명하라.” 치졸한 소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복수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서 그의 인격이 증명되면 과거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모함이 되어 버린다. 노이즈 마케팅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오늘에도 새겨들을 말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