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분(解紛): 꼬인 매듭을 푸는 지혜 3
3) 위기를 기지로 넘기다 (응변 應變)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밤에, 일을 담당한 재상들이 예문관 관원을 파면하기를 청하고, 이조 낭관을 불러 그날로 정사(政事)를 처리하게 하였다. 구수복(具壽福)이 그때 낭관이 되었는데, 부름을 받고 대궐에 도착하여 항의하며 말하였다.
“사관(史官)을 모두 파직한다면, 오늘날 사실 기록은 누가 담당하겠습니까?”
그가 하교에 서명하지 않자, 당사자들이 크게 노하여 왕명 거역의 죄로 처벌하려 하였다. 이때 새벽종이 울리면서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비로소 궐 안으로 들어왔다. 구수복이 거역한 연고를 말하니, 영의정이 “알겠네” 하고는 더는 말이 없었다.
영의정이 빈청(賓廳)에 들어가니, 당사자들이 먼저 이 일을 꺼내어 노발대발하였다. 영의정도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그들의 마음도 진실로 조금 누그러졌다. 날이 새자 초계(抄啓 중요한 것을 추려 뽑아 임금께 아룀)하는 일을 크게 논의하는데 영의정이 말하였다.
“주상께서 지금 진노하신 상태이니, 이런 일은 차차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을 끌었으므로 곧장 내쫓기지 않았고, 또한 큰 죄도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영의정 정광필이 임기응변을 잘하여 어진 이를 도와 나랏일을 도우며, 남을 구제하여 덕을 펼치며, 거친 것을 포용하여 사나운 것을 달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기묘사화가 벌어지던 날 재상들은 예문관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사관의 업무를 무력화시켜서 그들의 부끄러운 행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구수복은 그런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 역사를 지우려는 사람들과 역사를 남기려는 사람들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정광필은 구수복의 보고를 듣고 알겠다는 짧은 답변 외에는 침묵을 지켰다. 회의장에서 사람들이 구수복을 성토하자 정광필은 크게 노하며 함께 구수복을 꾸짖었다. 맞불로 분노의 불길을 껐다. 그들의 성토를 무마시키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주상의 진노를 언급하며 처벌을 유예시킨 것도 대단한 수완이었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격정도 잦아들자 구수복이 큰 죄로 처벌받는 일도 없어졌다. 정광필은 구수복을 적극적으로 구호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의 분노를 받아주고, 시간을 벌어주었다. 사람들과 척지지 않으면서도 불의한 일에 대응하는 현명한 방식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의 수레가 지나는 곳마다 하인들이 저지르는 행패가 평소보다 배나 늘었다. 환관의 종들이 관리들에 비해 더욱 심했다. 금암(金巖)에 도착하던 날에는, 음식을 빼앗으려고 어소(御所)에 까지 함부로 들어왔다. 선전관과 여러 무사들도 막지 못하였고 임금께 바칠 물건도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다.
신계현령(新溪縣令) 정윤지(丁胤祉)가 거짓으로 땅에 쓰러진 채,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보니, 숨이 끊어진 사람과 같이하였다. 그리고는 하인들에게 돌아다니며 소리쳐 ‘아무개 현령이 사람에게 살해당했소!’라고 말하게 했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급히 그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잡아 목 베게 하여, 드디어 어공(御供, 임금께 바치는 물건)을 뺏긴 책임을 모면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사람은 꾀(術)가 없어서는 안 된다. 오늘 같은 난동은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막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은 피난길에 나섰다. 지엄한 임금의 권위는 땅바닥까지 추락하였다. 그러자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행동을 하고, 임금의 처소가 약탈과 난동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임금께 바칠 음식까지 빼앗길 지경이었지만 난동을 진압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신계 현령 정윤지는 난데없이 쓰러져 죽은 시늉을 하는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 이 연기 탓에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일순 행동을 멈췄고 임금은 난동을 피운 사람을 잡아 목을 베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정윤지는 꾀를 내어 죽은 척을 한다. 이로 인해 난동을 부린 사람들을 제압하고 어찬을 뺏긴 책임도 모면했다. 정윤지는 죽은 척을 해서 도리어 살아나게 되었다.
우첨지(禹僉知) 복룡(伏龍)은 지혜가 많고 문장에 능하며, 그 문장으로 자신의 지혜를 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엄하지 않아도 일이 잘 처리되었다. 일찍이 고을 백성이 조세(租稅)를 체납하고, 가난이 심하다고 호소하며 갚지 못하고 있었다. 공이 말하였다.
“나라의 곡식을 어찌 체납할 수 있겠는가? 네 집에 대신 납부할 만한 물건이 있는가?”
백성이 말하였다.
“가난하여 다른 물건은 없고 오직 닭 한 마리만 있습니다.”
우복룡이 말하였다.
“닭을 삶아 오너라. 내가 닭을 먹고서 너의 곡식을 감해주마.”
백성이 그 말을 믿고, 다음 날 닭을 삶아 바치자, 공이 말하였다.
“장난한 것이었다. 어찌 태수로서 백성의 닭을 먹고 국가의 곡식을 축내는 자가 있겠는가? 빨리 가져가거라.”
백성이 이미 문밖으로 나가자, 여러 아전이 닭을 나누어 먹어버렸다.
조금 있다 공이 백성을 불러 다시 말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미 너로 하여금 닭을 잡아오게 하고도 받지 않는다면 이는 너를 속이는 것이다. 어찌 어진 사람이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속일 수 있겠느냐? 네 닭을 도로 가져오면 마땅히 약속대로 하겠다.”
백성이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고하자, 공이 드디어 여러 아전의 성명을 기록하고 그들로부터 그 조세를 징수하니 즉시 모였다. 여러 아전이 놀라 복종하며 우복룡을 다시는 속일 수 없었다.
그는 관리로서 조세를 거둬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백성은 가난해서 조세를 납부할 상황이 안 되었다. 우복룡은 백성에게 닭을 가져오라 한 후 기지를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닭을 매개로 아전들의 비리를 유도하여 적발하고 그들을 통해 조세를 징수하게 하였다. 아전들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습성을 역이용한 셈이다. 공짜 닭이라는 미끼를 던져서 대납이라는 그물로 포획했다. 조세는 거둬지고 백성은 조세의 부담에서 벗어났다. 약자를 구하기 위해 악인들의 욕망을 역이용한 원님의 지혜였다.
이완평(李完平, 이원익을 가리킴)이 처음 승문원(承文院, 괴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 창릉(昌陵, 예종(睿宗)과 순안왕후(順安王后)의 능)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봉상시(奉常寺)의 어린 노비가 제기에 담긴 음식을 훔쳐 먹었다. 공은 곧바로 밤에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제수(祭需)를 받아 가지고 일을 치른 적이 있었다.
비록 그 노비를 법에 따라 처벌해야 마땅했으나, 공은 그가 어리석어 잘못 법에 걸린 것을 불쌍히 여겨, 복계(覆啓)하는 재신들에게 힘써 말해 가볍게 처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였다.
왕릉 제사에 올린 제수를 어린 노비가 훔쳐 먹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단순한 절도죄가 아니라 불경죄에 해당할 수 있다. 이원익은 일단 감정적으로 일 처리를 하지 않고, 제수를 다시 마련하여 제사를 치른 뒤 노비의 극형을 막아주었다. 이 두 가지 일 처리 중에 두 번째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한 노비의 일탈 행동에 화가 날 법도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노비를 구제하기까지 한다. 오죽하면 제수에 손을 대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사안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법의 공정성과 처벌의 적절성 사이에 고민하는 지금에도 통찰을 제공하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