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나의' 소유형용사와 동사의 명사부류 접두사
스와힐리어 듀오링고가 11점을 넘으면서 아주 재미있는 구간에 들어섰다.
우선 인칭수별 소유형용사, 즉 '나의', '너의', '그의', '우리의', '너희의', '그들의'를 자주 볼 수 있다.
러시아어나 독일어 등 유럽의 굴절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소유 표현이 소유주의 인칭수와 피소유물의 성, 수, 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나의', '너의' 등의 소유형용사가 남성명사 '친구'를 수식할 때와 여성명사 '책'을 수식할 때 각각 형태가 달라진다.
'내 친구(남성)'는 мой друг(moj drug), '네 친구'는 твой друг(tvoj drug)이지만,
'내 책(여성)'은 моя книга(moja kniga)이고, '네 책'은 твоя книга(tvoja kniga)가 된다.
스와힐리어의 소유형용사도 이와 비슷하다. (피소유물의 '격' 표시는 하지 않지만)
다만 이쪽은 교착어답게 소유주의 인칭수 정보를 나타내는 형태소와 피소유물의 부류 정보를 나타내는 형태소가 좀 더 명확하게 나뉘는 편인 듯.
사실 언어나 언어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이런 추상적인 말로만 설명을 들으면 무슨 얘긴지 금방 와닿지 않을 것이다.
바로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hhgcMxsYHL0
'바바 예투' 노래는 '문명 4'라는 유명 게임의 타이틀곡인데, 그 내용은 스와힐리어 주기도문 가사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워낙 유명한 노래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하다.
이 노래 덕에 '바바 예투'라는 말이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나 '젠가(jenga)'와 함께 국내에 가장 널리 알려진 스와힐리어 표현으로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막상 이 '바바 예투'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노래가 스와힐리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많이들 모를지도)
앞에서 이 노래가 스와힐리어로 된 주기도문이라고 했다.
그 점을 떠올리면 'Baba yetu'라는 제목의 의미를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다.
스와힐리어 'Baba yetu'는 '우리 아버지'라는 뜻이다.
(주기도문의 첫 구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나오는 바로 그 '우리 아버지'가 맞다.)
''아버지'에는 양순파열음'이라는 범언어적 경향성(?)을 잘 보여주는 'Baba' 뒤에,
서두에 이야기한 1인칭 복수의 소유형용사 'yetu', 즉 '우리의'가 등장한다.
위에서 스와힐리어 소유형용사는 교착어답게 피소유 명사의 정보와 소유주의 정보를 나타내는 형태소가 잘 분리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바바 예투'의 'yetu' 또한 사실 두 개의 형태소로 이루어져 있는 말이다.
'yetu'는 제9부류(Class IX) 접두사 'y-'와 1인칭 복수 소유형용사 어근(?) '-etu'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니까 스와힐리어 'yetu'에는 '우리의'라는 의미와 동시에, 피소유자 'baba'가 제9부류에 속하는 명사라는 정보 또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요즘 듀오링고에 자주 등장하는 소유형용사 문제를 풀 때,
워낙 많이 들어서 머릿속에 통째로 저장되어 있는 이 '바바 예투' 표현이 큰 도움이 된다.
듀오링고에 '... ..etu ...'라는 문장이 나오면, '바바 예투'를 떠올려서 '잘 모르겠지만 무슨 '-etu'라니 대충 '우리의'라는 뜻이겠군'하는 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Our offices'는 스와힐리어로 'Ofisi zetu'라고 한다.
'offices'를 뜻하는 'ofisi'가 제10부류 명사이기 때문에, '우리의'를 뜻하는 '-etu' 앞에 제10부류 접두사 'z-'가 붙은 것이다.
('우리의'가 '-etu'인 거랑 동사에 붙는 1인칭 복수 주어 표지가 'tu-'인 건 우연의 일치일까)
한편 '바바 예투' 노래 가사에는 또 다른 소유형용사도 등장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할 때 그 '당신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을 뜻하는 'jina lako'가 그것이다.
(공동번역성서의 주기도문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로 의역되어 있어서 원문에 나오는 '이름' 명사가 드러나지 않는다.)
'yetu'처럼 'lako'도 두 개의 형태소로 되어 있다.
2인칭 단수 소유형용사 어근(?), 즉 '너의'를 나타내는 부분은 '-ako'이고,
그 앞에 붙은 'l-' 접두사는 'jina', 즉 '이름'이 5부류 명사라는 정보를 표시하고 있다.
이 '-ako' 또한 듀오링고에서 종종 볼 수 있다.
'your sign'을 뜻하는 'ishara yako'를 보면 '너의'를 나타내는 말이 'yako'로 되어 있다.
접두사 'y-'는 'yetu'에서 본 것과 같은 제9부류 접두사이고, (즉 피소유 명사 'ishara'가 제9부류임을 표시)
그 뒤에 붙은 '-ako'가 '너의'라는 의미를 담당하고 있다.
듀오링고 코스에는 '-etu'(우리의)나 '-ako'(너의) 이외에도 다양한 소유형용사가 등장한다.
'Ninapenda kompyuta yangu'(나는 내 컴퓨터를 좋아한다)에서는 '-angu'(나의) 앞에 9부류 접두사 'y-'가 붙은 모습을,
'Wanahitaji kamera yao'(그들은 그들의 카메라가 필요하다)에서는 '-ao'(그들의) 앞에 9부류 접두사 'y-'가 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컴퓨터'나 '카메라'처럼 외국어로부터 차용된 말은 거의 9부류로 들어가는가 보다.
한편 '내가 좋아한다'라는 뜻의 'ninapenda'는 전에 이야기했던(링크) 유명한(?) 문장(?) '니나쿠펜다(Ninakupenda)'를 참고하면 잘 이해된다.
요즘의 스와힐리어 듀오링고 코스가 재미있는 이유는 소유형용사 말고도 또 있다.
스와힐리어의 매력을 이야기한 글(링크)에서 언급했듯이,
스와힐리어 동사의 주어 일치 접두사(‘주격 전철’) 중 주어가 3인칭임을 나타내는 접두사는 단순히 인칭수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주어 명사가 어느 ‘부류(class)’에 속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작은 아이가 걷는다'에서는 주어가 사람(제1부류)이므로 동사 '걷는다'에 3인칭 단수 주어 접두사로 'a-'가 붙지만,
'작은 책이 걷는다(?)'에서는 주어가 'ki-'부류(제7부류)이므로 동사 '걷는다'에 3인칭 단수 주어 접두사로 'ki-'가 붙고,
'작은 바나나가 걷는다(?)'에서는 주어가 'n-'부류(? 제9부류)이므로 동사 '걷는다'에 3인칭 단수 주어 접두사로 'i-'가 붙는다.
(이때 'ki-'처럼 명사와 형용사와 동사에 붙는 접두사가 모두 똑같은 부류도 있지만,
1부류의 'm-'과 'a-', 9부류의 'n-'과 'i-'처럼 명사류(명사+형용사)와 동사에 붙는 접두사가 서로 다른 경우도 있어서 약간의 암기 부담을 더한다.)
그동안의 스와힐리어 듀오링고 코스에서는 대개 주어가 사람인 문장만을 공부했기 때문에,
자칫 주어가 3인칭 단수면 동사에 접두사 a-가 붙고, 주어가 3인칭 복수면 동사에 접두사 wa-가 붙는 것처럼 간단히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제는 주어가 사람이 아닌 문장도 왕왕 나오고 있다.
좀 더 다양한 3인칭 주어 접두사의 모습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Kitabu ki-na picha. "책에 사진이 있다."
주어 '책'이 제7부류 명사이므로 동사 '가지다'에 7부류 접두사가 붙어 있다.
('picha 피차'는 영어 'picture'의 차용어라고 한다.)
Ndizi zi-na-pik-wa(10부류주어-현재-조리하다-수동태).
"바나나 (여러 개)가 조리되고 있다."
주어 '바나나(복수)'가 제10부류에 속하는 명사이므로,
동사 '-pikwa(조리되다)'의 앞에 제10부류 주어 접두사가 붙어 있다.
(제10부류는 제9부류의 복수인데, 재미있게도 제10부류의 명사류 접두사는 'N-'으로 제9부류와 같지만, 동사에서는 'i-'가 아닌 'zi-'로 구분된다.)
Taa i-na-tengenez-wa(9부류주어-현재-고치다-수동태).
"A light is being fixed."
주어 '불빛'이 제9부류에 속하는 명사이므로,
동사 '-tengenezwa(수리되다)' 앞에 제9부류 주어 접두사가 붙어 있다.
암튼 이런 게 재미있다!
과제가 많아서 간단히 하고 말려고 했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끝.
+ 영어 위키백과 Swahili 문서의 Agreement 단락을 읽어 보니 스와힐리어를 모어로 쓰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부류 일치 체계를 '인간 대 비인간' 정도로 대폭 단순화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표준 스와힐리어가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부의 넓은 지역에서 쓰이는 비표준 현실 소통용 스와힐리어를 배우려고 한다면 마음이 좀 놓이는 부분인 듯.
https://en.wikipedia.org/wiki/Swahili#Agre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