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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의 낭만

규범주의와 기술주의

by 사오 김 Sao Kim

“책을 한 권만 읽고서 아는 체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들 한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 찾아보려고 했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나는 ‘한 권만 읽고 아는 체하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할 때가 많다. 규범주의적 언어관(표준어 제일주의)에 대해 괜히 막 반감을 드러낼 때가 대표적이다.


이제껏 몇 번 드러냈듯(링크1 링크2 링크3), 나는 규범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학문으로서의 언어학이 취하는 입장 또한 기본적으로 규범주의와는 다르므로, 스스로 언어학자들과 입장을 같이한다는 일종의 자부심같은 것도 갖고 있다.


처음 반-규범주의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은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다지 멋진 계기는 아니었고, 채팅을 하다가 누가 내 맞춤법을 지적하자 그에 대한 반감으로 핑계를 생각해 내다 보니, 당시 내 기준으로 꽤 그럴싸한 논리를 얼떨결에 갖추게 된 것이다.


'꽤 그럴싸한 논리'란 이런 것이었다. 지금의 표준어래 봤자 늘 있던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언어로부터 여러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였다. 이런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대화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릴 만한 발상이다.


실은 지금도 중학생 시절의 그런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다. 표준어는 시공간적으로 아주 넓은 범위에 존재해 온 수많은 변이형 중에 그냥 언어 외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우연히 선택된 인위적 규칙의 집합일 뿐,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전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내 눈에 마치 규범주의를 옹호하는 듯 보이는 발언을 하는 장면도 여러 번 목격했으므로, 규범주의에도 뭔가의 유용성이 있겠거니 하는 정도의 생각은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 이제 표준어가 꽤 쓸모있는 것이라는 말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규범을 따르는 어형에서 모종의 미감을 느끼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언어학은 언어 사용을 기술(describe)할 뿐, 표준어 규범을 만들고 강요하거나 언중의 언어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이러한 언어학의 입장은 사실 언어를 여러 개 관찰하다 보면 꽤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언어학도에게 '몇 개 국어 하느냐'고 묻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밈이 있다. 언어학은 외국어 여러 개를 잘 구사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서 언어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 언어학도가 기껏 그런 오해를 설명하고서는 결국 '실은 꽤 많은 언어를 배워 보았다'고 대답한다는 밈도 있다. 언어의 성질을 이해하려면 가급적 여러 언어의 모습을 접해 보는 편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규범주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여러 언어를 둘러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


- 'ain't got nothing(아무것도 없다)'과 같은 비표준 영어의 '이중부정'을 '비논리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스페인어처럼 이러한 구문을 아예 표준으로 삼는 언어 사용자를 싸그리 아울러 비논리적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 '신라'를 [신라]라 읽는 비표준 발음이 '인간 구강구조상 너무 불편한 발음이어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국어 교사는 'only'같은 기초적인 영단어도 모르느냐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건 규범주의의 전형하고는 좀 동떨어진 사례지만 의외로 학교 현장에서 꽤 마주칠 수 있는 유형이다.)



요컨대 여러 언어의 다양한 모습을 많이 접할수록, 자신이 '그른 것', '추한 것', '비논리적인 것'이라고 믿어 왔던 구문이나 발음이 다른 곳에서는 얼마든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잘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 언어가 아주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이러한 이점이 있다.


'언어 다양성'에 대해 배우기에 아주 좋은 책이 한 권 있다. Lindsay J. Whaley라는 사람이 1996년에 쓴 언어유형론(linguistic typology) 교재이다.



네이버에 '언어유형론'을 검색하면 마치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링크)' 정도가 무슨 언어유형론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글이 여럿 보인다. 그런 글을 읽고 언어유형론에 대해 잘못된 인상을 갖게 된 사람은 '무슨 그런 주제로 책까지 내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의 유형은 상상할 수도 없이 다양하며, 언어유형론이 다루는 범위는 고작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소개해 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어쨌든 인간 언어의 모습은 책 한 권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사실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 맨 앞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말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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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a Mae Heemstra에게

부정사를 너무 많이 나누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영어의 'to 부정사'를 나누는(split) 것은 규범주의가 아주 싫어하는 습관의 대표 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따르자는 게 이유였던 듯.)


위 문장은 'I tried not to split too many infinitives'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는 'to'와 'split' 사이에 다른 단어가 끼지 않고 연달아 나와 있으므로 규범에 맞는 문장이지만,

만약 'I tried to not split too many infinitives'라고 했다면 의미는 같되 규범주의자들이 싫어하는 비표준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Introduction to Typology'의 저자는 (Ida Mae Heemstra라는 사람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가급적 규범에 맞는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헌사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묘한 낭만이 느껴졌다. (또는 유머?)


내 생각에 사실 저자 Whaley 본인에게 있어서는 부정사를 나누든 나누지 않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이 언어학자들이 대개 규범주의보다는 기술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 자체가 인간 언어가 취할 수 있는 상상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직접 보여주며 설명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형용사'가 없는 언어, '주어', '목적어'와 같은 개념을 적용할 수가 없는 언어, 주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사물인지를 동사에 반드시 표시해야만 하는 언어 등 온갖 신기한 언어의 모습을 다루는 책을 쓰는데 영어 문장의 부정사가 나뉘든 안 나뉘든 그게 대수였을까?


만약 언어학자 Whaley가 나처럼 규범주의를 개의치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면 부정사를 애써 나누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귀찮은 것을 넘어서 오히려 불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일부러 '바래'를 쓰곤 한다.)


그러나 이 언어학자는 Ida Mae Heemstra라는 사람을 위해 가급적 부정사를 나누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자기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또는 심지어 불쾌한?) 일이더라도 이 책을 바칠 그 누군가가 불편을 느낀다면 기꺼이 그 정도는 신경 써 주겠다는 것이다.


거기서 뭔가의 낭만을 느꼈다.


재밌을 것 같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다 써 놓고 보니 마지막 문단이 좀 작위적이고 오글거리는 것 같다. 끝.



+ Ida Mae Heemstra가 누군지, 저자와 무슨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 규범주의를 옹호하는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지금의 표준어가 자의적으로 선택된 거라 할지라도, 우선 이미 정해진 표준어를 배우는 과정은 누구나 평등하게 거쳐갈 텐데, 사람에 따라 그걸 온전히 습득하기도 하고 습득 못 하기도 하는 건 각 개인의 능력과 책임의 문제 아닌가?"

즉 표준어 또는 윗 세대의 언어를 입력받은 그대로 구사하는 것은 높은 지적 능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다.


나는 거기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표준어나 윗 세대의 언어가 갖춘 모습이 실은 아무런 권위도 가치도 없는 자의적인 것임을 느끼지도 못하고 의심해 보지도 못하는 것 또한 무지의 소치가 아닌가.


또는 이런 대답도 가능하겠다. 누구나 한정된 지적 자원만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데, 겨우 표준어를 곧이곧대로 습득하는 일 따위에 자원을 낭비하기보다 다른 더 중요한 일에 사용한다면 그게 더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무엇이 우선인가 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3 네이버 블로그의 서로이웃 '꽃다발' 선생님께서, Ida Mae Heemstra가 저자의 외할머니이고 영어 선생님이었다고 댓글로 알려주셨다. 알고 보니 더 재미있다.


+4 언어학의 기본 입장이 어떻고 언어다양성이 규범주의에 주는 함의점이 어떻고를 떠나 Whaley가 실제로 split infinitive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는 결국 모르는 일이니, 그에게 그 규범이 '귀찮'았다거나 '불쾌'했다거나 '의미가 없'었을 거라는 말은 결국 내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을 너무 당당하게 쓴 것 같아서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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