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순의 언어유형론
자연언어에서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패턴(유형)의 현상이 관찰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패턴(유형)은 발견되더라도 극히 드물게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전치사나 조사와 같은 기능어(function word)가
명사나 동사와 같은 내용어(content word)보다 평균적으로 더 길거나 복잡한 형식을 취하는 언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능어의 형식 > 내용어의 형식]이라는 유형과 [기능어의 형식 < 내용어의 형식]이라는 유형 두 가지가 모두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자연언어에서는 전자가 거의 관찰되지 않고 후자만 많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형식의 크기가 사용 빈도와 반비례한다는 관찰(링크)과 기능어가 보통 내용어보다 고빈도로 사용된다는 관찰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 가능하다.
이렇듯 유형 간의 불균형을 기술하고 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언어유형론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언어유형론의 매력은 배제하는 설명력에 있다, 고도 표현할 수 있다.)
또 다른 간단한 예로서 어순(word order; Whaley에 따르면 사실은 constituent order)을 들 수 있다.
언어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한국어, 일본어 어순은 SOV(주어-목적어-동사)"라거나 "영어, 중국어 어순은 SVO(주어-동사-목적어)"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과하게 단순화되기 쉽기는 하지만[1], 일단 가볍게 다뤄 보기는 좋은 주제이다.
언어유형론 데이터베이스 WALS(World Atlas of Language Structures online)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 된 1376개 언어 중 무려 564개 언어(40.9%)가 SOV, 488개 언어(35.4%)가 SVO를 기본 어순으로 한다. 세계 언어의 76% 이상이 주어를 맨 앞에 두는 어순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위 표에서,
- 한국어처럼 ‘내가 사과를 먹는다’의 기본 어순을 취하는 SOV 언어는 564개,
- 영어처럼 ‘내가 먹는다 사과를’의 기본 어순을 취하는 SVO 언어는 488개,
- 아일랜드어처럼 ‘먹는다 내가 사과를’의 기본 어순을 취하는 VSO 언어는 95개,
- 남도어족(링크)의 Nias어처럼 ‘먹는다 사과를 내가’의 기본 어순을 취하는 VOS 언어는 25개,
- 브라질의 Hixkaryana어처럼 ‘사과를 먹는다 내가’의 기본 어순을 취하는 OVS 언어는 11개,
- 브라질의 Nadëb어처럼 ‘사과를 내가 먹는다’의 기본 어순을 취하는 OSV 언어는 4개로 기록되어 있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S, V, O의 순서는 총 6가지이므로 만약 세계 언어의 어순이 완전히 무작위적인 분포를 보였다면 각 어순 유형은 모두 16% 정도, 즉 약 230개씩이 관찰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WALS에서 고른 1376개의 언어 표본이 계통적, 지역적 편향을 모두 제거한 바람직한 표본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SOV, SVO는 기대 빈도보다 각각 두 배 이상씩 많고, VSO는 기대 빈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며, VOS, OVS, OSV의 세 가지 유형은 비율을 따지는 게 거의 무의미할 만큼 드물다.
Whaley(1997) 등의 언어유형론 개론서를 보면, 이러한 어순 분포의 불균형은 이미 1960년대부터 관련 주제를 다룬 몇 가지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Whaley(1997:82-86)에서는 이러한 불균형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1. 어떤 사건을 시작하고 통제하는 것은 대개 주어이므로 이를 맨 앞에 (또는 목적어보다 앞에) 두는 것이 주어의 인지적 현저함을 잘 반영한다(Comrie, 1989:93)
→ 세계 언어 어순 순위 1, 2, 3등이 각각 SOV, SVO, VSO임이 납득 가능.
2. (생성문법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타고나는 문법 규칙은 '동사구(VP)'의 구조를 대략 '동사와 그 목적어의 묶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언어(위 표본의 약 79% 이상)에서 목적어는 동사와 딱 붙어서 등장한다. 주어는 이 동사구의 바깥에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동사와 목적어 사이에 낄 수 없다. (근데 이게 '설명'인가? 그냥 그렇게 타고났다는 주장인데)
→ 세계 언어 어순 순위 1, 2등이 각각 S[OV], S[VO]임이 납득 가능하고, S가 V와 O 사이를 갈라놓는 어순(VSO, OSV)은 1376개 언어 중 겨우 99개뿐(약 7%)임이 납득 가능.
흥미롭게도 Whaley 교재에서는 이상 제시한 두 가지 설명의 맹점 또한 짚고 있다.
바로 '주어를 앞에 두라'는 원리와 '목적어를 동사 바로 옆에 두라'는 원리를 하나 이상 위반하는 기본 어순(VSO, VOS, OVS, OSV; 이 중 OSV는 두 원리를 모두 어기고 있다)을 취하는 언어가 세상에 아예 없는 게 아니고 분명히 관찰되기는 관찰된다는 사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지적이다.
교재에 따르면 Dik(1978)이나 Derbyshire(1985) 등의 연구에서 이러한 언어들에 대해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요인이 몇 가지 관찰되었다나 보다. 그게 뭔지는 알려주지 않는데, 꽤 궁금하다.
같이 읽으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saokim/65
-----------------------------------------------------------------
[1] '기본 어순'을 상정하는 일의 어려움 및 이러한 어순 유형론이 자칫 놓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Whaley(1997:79-)나 Velupillai(2012:284-) 등의 언어유형론 개론서를 참조. Velupillai에서 인용하는 Dryer(2011)의 통계는 WALS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Whaley(1997)의 언어유형론 개론서 제목은 Introduction to Typology: The Unity and Diversity of Language.
Velupillai(2012)의 언어유형론 개론서 제목은 An Introduction to Linguistic Typology.
한편 Velupillai(2012)의 언어유형론 교재는 어순 외에도 언어유형론에 대해 흥미로운 통찰을 몇 가지 담고 있는데, 다음에 별도의 글로 써 보면 좋겠다. 대략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재미있다.
언어유형론의 대상은 종전과 같이 개별 언어 단위로 할 것이 아니라 언어 현상 단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개별 언어는 각각 자기 안에도 수많은 유형의 현상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 기존에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 정도로 단순하게 알려진 '형태론의 유형론'은, 이하의 3가지 매개변수가 교차되는 훨씬 다양한 유형의 형태론 현상들이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실제로 관찰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
1. fusion(융합도): 주로 문법 형태소에 대해서, '어간'과의 거리가 가까운가 먼가? 가장 가까운 것은 어간 변형 등의 비선형적(non-linear) 표현, 중간은 같은 단어 안에서 형태소가 구분되는 연결적(concatenative) 표현, 가장 먼 것은 어간과 아예 독립된 단어가 되는 고립(isolating) 표현.
2. exponence(지수?): 하나의 문법형태소가 한 가지의 문법 범주(의미)만 표시하는가 아니면 여러 개의 문법 범주(의미)를 한꺼번에 표시하는가? (separative vs cumulative)
3. flexion(굴절 부류에 따른 이형태 유무): 같은 문법 범주가 어휘 부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는가, 그러지 않는가?
- 이상 3가지 매개변수가 복잡하게 얽혀서,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보다 훨씬 다양한 유형의 현상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로 관찰된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Kasong어와 Wari’어 예문은 단순히 분류하면 둘 다 '고립어'지만, exponence에서 차이가 난다. Kasong어 예문은 단어 하나에 하나의 기능만 들어 있으므로 isolating separative이지만, Wari’어 예문은 각각의 단어가 여러 의미를 한꺼번에 부담하고 있으므로 isolating cumulative이다.
사실 Velupillai는 여기에 네 번째 매개변수로 'synthesis(종합도; 하나의 단어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쌓여 실리는지)'를 제시하는데, 이상 이야기한 내용하고 겹치지 않나 싶기도 하다.
Velupillai는 Whaley와 달리 챕터마다 수어 이야기를 꼭 넣어 줘서 아주 반갑다.
조만간 '언어유형론은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가 다가 아니다'라고 한번 쓰려고 했는데, 이번 글이 이를 두 가지 차원에서 보여주는 글이 되었다.
-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라는 분류와 기본적으로 무관한(일단 어느 정도 독립적인) '어순'이라는 주제가 또한 언어유형론의 논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과,
- 교착어, 굴절어, 고립어라는 분류가 완벽하고 엄격한 것이 아니라 편의적인 분류에 불과하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