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왕년 이야기 (ft. '이사통')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보고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리다

by 사오 김 Sao Kim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가 인기다.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이사통'이라는 줄임말도 있을 정도다.

('자주 입에 오르는 말은 짧아진다'는 사실을 어느 꿀잼 블로그에서 짚어 준 바 있다. - 어쩌면 이런 점을 이용해 제작사 측에서 먼저 만든 줄임말일지도.)


난 인기 콘텐츠를 제때 즐기지 못하는 편이라 아직 보지 못했는데, 주위에는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그 중 너댓 명에게서 최근에 직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가 좀 흥미로워 글을 써 보게 되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란, 그들이 이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 캐릭터 '주호진'을 보고 나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우선 당연히 얼굴 이야긴 아니다. 나는 내 생김새에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지만, 주호진 씨랑 요만치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것쯤은 정확히 안다.


그럼 내 주변의 직간접적 지인 너댓 명은 무슨 이유로 그를 보고 나를 떠올렸다고 했을까?


그야 뭐 그냥... 새삼스럽게도 내가 언어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주호진 통역사가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폴리글롯(polyglot)이니까 말이다.


그치만 여기서 끝날 이야기였다면 굳이 블로그에까지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본론은 이제 시작이다.


'이사통' 남주를 보고 나를 떠올렸다는 사람 중에는 아내의 지인도 있었다. 아내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마 이런 장면 때문이었을 거다’라며 내게 '이사통'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여줬는데, 그것이 내게 '왕년'의 추억을 하나 떠올리게 해 주었다.


('파파고가 뭐야?'까지만 보면 된다.)

https://youtu.be/FOwdpWfT090?si=9guREIN4E_b1TDMi&t=380

(넷플릭스 영상을 글에 옮겨 실을 방법이 이런 거 말고는 안 떠오른다.)


위 영상을 보면 남주 '주호진'은 일본의 한 식당에서 어느 이탈리아 아이가 알레르기로 쓰러진 것을 보고 그 엄마에게 이탈리아어로 상황을 전달받고서는 곧장 일본어로 점원에게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요청한다. 리뷰 영상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도로가 좁으니 넓으니 하면서 이탈리아어-일본어로 좀 더 오래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있다.


내가 선택한 영상이 (저작권 이슈를 피하기 위해?) 너무 어수선하게 편집되어서 잘 전달되지 않지만, 직접 보면 상당히 멋있는 장면이다.

(언어덕후 만세! - 실제론 아마 몇 군데 살다 온 사람이 아니면 '이사통' 주인공처럼 여러 언어를 잘하긴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통역사를 하려면 통역 훈련도 따로 받아야 하고...)


나도 왕년엔, 이만큼 멋있진 않지만 꽤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피부가 아직 깨끗했던 청소년 시절의 나는 러시아어를 전공하는 외고생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대전광역시는 당시 일본의 삿포로 시,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 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각 시의 청소년이 해마다 서로의 도시를 방문해 홈스테이와 여러 행사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검색해 보니 이제 중국 선양 시하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 해에는 일본, 러시아의 중고등학생들이 대전시를 방문했고, 나를 비롯한 대전의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일주일쯤 여러 일정을 소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런 경험은 그 자체로도 누구에게나 특별한 것이겠지만, 내가 '왕년' 운운하면서까지 이때를 추억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각국 인솔자 포함) 중에 러시아어, 일본어, 한국어 세 가지 언어로 모두 큰 불편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호스트였던 대전시 측에서는 한국어-일본어 통역 인력과 한국어-러시아어 통역 인력을 지원하였는데, 일본어 통역 담당은 당연히 러시아어를 전혀 몰랐고, 러시아어 통역 담당은 일본어를 전혀 몰랐다.


심지어 러시아어 통역 담당자는 한노통역을 잘 못 해서 러시아 친구들의 불만이 많았고, 결국 경질되어(?) 다른 분으로 교체됨. 덕분에 하루는 러시아어 통역에 아예 공백이 생겨 내가 일일 한러통역을 잠깐 해 봤었는데(무슨 도자기 체험 프로그램 때였다), 재미는 있었지만 역시 엉망이긴 했다.ㅋㅋ


어쨌든 그래서 행사 기간 내내 나는 어느 정도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고, 나는 원래 이런 주목을 즐기는 사람이라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일어랑 러시이어를 둘 다 하는 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일이 하나 있다.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적자면 이런 일이었다.


행사가 무르익어 가던 어느 날 밤,


키가 무지 큰 러시아 친구 한 명이 나더러 갑자기 일본 측 인솔자에게 할 말이 있다며 통역을 도와달라고 했다. 너무 크고 표정이 무뚝뚝해서 좀 무서웠는데 일단 따라갔다.


용건은 대략 이랬다.


이 행사가 지난해에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시에서 개최되었다. (우리 학교 같은 반 친구가 여기에 가서 뉴스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어로!)


키 큰 러시아 친구는 그때 러시아에서 같이 놀았던 일본 친구와의 추억이 좋았는지 이번에 대전에 오면서 일본 친구에게 줄 선물을 챙겨왔는데, 하필 이번에는 그 일본 친구가 행사에 불참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 측 인솔자를 통해 이 선물을 전달하려는데 그게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선물을 어디로 갖디 드리면 되는지 (일본 인솔자가 묵는 호텔 객실 번호를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역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걸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열심히 통역했고 러시아 친구의 의도와 일본 인솔자 측의 답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주호진 씨가 이탈리아어-일본어 통역을 하는 것만큼 유창하고 원활하지도 않았고 그만큼 위급하고 중요하거나 멋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러시아어와 일본어 사이를 직접 통역하는 한국인이라니!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게 나뿐이었단 사실이 그때도 지금도 뭔가의 뿌듯함을 가져다 준다. 비록 지금은 러시아어를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불초 제자를 아껴주시던 외고 선생님들께 죄송할 따름)


열심히 통역하던 중에 좀 웃긴 일이 하나 있었다.

당시 일본어 통역 담당자가 좀 외향적인 분이셨는데, 러시아 친구가 일본 측 인솔자와 대화하려는 상황을 보시곤 습관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에 나니나니?' 하며 오셨다가, 순간 러시아 친구를 보고는 자기가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아 너 아니구나 ㅎㅎ' 하고는 가셨다. 러시아 친구는 러시아인답게(?) 시크하게 눈길 한 번 주고는 무시...


내 인생 잠깐 빛나 보았던 장면을 이렇게 나누어 본다. 끝.




+ 아마 이 일보다 나중이었던 것 같은데, 문화 차이와 몇 가지 이슈로 인해 내가 키 큰 러시아 친구한테 막 난리를 치며 화를 내는 바람에 분위기를 완전히 망치고 계획되었던 일정이 하나 취소되어 버리는 흑역사도 있었다. ... 그러고도 ‘내 인생 잠깐 빛나 보았던 장면’을 운운하다니, 관계자 분들 죄송합니다.


++ 종종 말하는 건데 이때의 나는 일어 お前가 그냥 한국어 ‘너’랑 같은 건 줄로만 알고 초면인 일본 친구들에게 막 오마에 오마에 했더랬다. 그래서 다들 당황... 거기서 곧바로 교정을 받았었는지 나중에 다른 데서 배웠었는진 잘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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