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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째 세계여행 중인 독일 아저씨를 만나다

외국어 공부의 소소한 쓸모

by 사오 김 Sao Kim

며칠 전의 일이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혼자 본가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본가 근처 역에서 전철을 내렸는데 어느 서양인 백발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내표지판을 보고 두리번두리번하는 게 영락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새였다.


아저씨는 다리가 하나 없는 돋보기 안경을 꺼내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가, 안내판을 봤다가 하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냐고 영어로 말을 걸어 볼까 싶었다. 그러다 혹시라도 아저씨가 헤매고 있다는 게 내 착각이면 괜히 어색해지기만 할 거 같아서 그만뒀다.


원래 나는 어디서든 외국어를 구사할 기회가 있으면 최대한 나서 보려고 하는 편이다. 외국인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리낌은 전혀 없다. 유일한 문제는 내가 나서는 게 상황상, 타이밍상 적절한가이다.


몇 년 전까지는 너무 대책없이 말을 걸었다가 상황이 좀 어색해지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이제 뜬금없이 말 거는 건 자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돌발행동은 그나마 나이가 어릴수록 용인되는 듯한데, 난 점점 그런 걸 용인받기 어려운 나이가 되어 가고 있기도 하다.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전철역에서 헤매는 외국인’이란 외국어를 구사하기에 최고의 기회라 할 수 있다. 그쪽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니 내가 말을 걸더라도 감사인사를 받았으면 받았지 상황이 이상해질 일은 없는 것이다.


몇 년 전엔 전철역에서 헤매는 미국 사람, 러시아 사람이나 일본 사람을 마주쳐 도와주고는 했는데 매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영어, 러시아어, 일본어 연습도 하고 고맙단 말도 들으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러시아 아저씨들이 이 나라에서 러시아어를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반가워했던 게 떠오른다.)


외국어로 대화하기는 좋아하지만 새로운 사람하고 너무 친해지는 건 부담스러워하는 내 성격에 딱 이 정도의 짧은 교감, 아무래도 좋은 짧은 인연이 잘 맞는 점도 있다.


하여튼 이번에도 관건은 이 서양 백발 아저씨가 실제로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 맞는가 아닌가였다. 아무래도 100% 확신할 수는 없었고, 본가에 슬슬 도착해 간다고 말해 놓았었기 때문에 그냥 발길을 돌렸다.

(‘슬슬 도착해 간다’는 좀 묘한 표현이다.)


그러다 한번 뒤를 돌아 보았는데, 아저씨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내가 망설이기만 하는 동안 결국 다른 사람을 찾으셨군요, 아련한 안녕...’ 하면서 내 갈 길을 가려는데, 아저씨가 도움을 청한 사람과 왠지 소통이 좀 원활하지 않아 보였다. 한번 가까이 가 보기로 했다.


아저씨는 한국어로 된 전철 경로 안내를 자기 폰 화면에 띄워 놓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한국 사람한테 영어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뭔가가 해결되고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저씨가 도움을 청한 한국 사람은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편인 거 같았다. 파파고 한영번역 화면을 띄워서 본인이 전달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로 입력하고 있었는데, 우선 그 말이 제대로 전달되더라도 상황상 그 뒤로 더 나눠야 하는 말이 꽤 많아 보였고, 어쨌든 내가 보기에는 조금 곤란해 보였다.


이 정도면 내가 나서더라도 그다지 부적절한 행동이 아닐 거라는 판단이 섰다. (사실 이 상황을 꽤 가까이에서 계속 지켜본 게 이미 좀 이상함)


서양 백발 아저씨한테 ‘반드시 이 경로대로 가야 하는 거냐’고 물었고 한국 사람한테는 ‘혹시 제가 도와드려도 되나요?’라는 식으로 물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마 돕고 있던 한국 사람한테보다 아저씨한테 말 건 게 먼저였던 거 같고, 그건 한국 사람한테 약간 실례였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제가 도와드려도 되냐는 말에 한국 사람은 다소 무표정하게 ‘네, 말이 되시면’ 하며 뭔가 손님을 안내할 때 하는 것과 같은 한국인 특유의 제스처로 서양 백발 아저씨 돕기 미션을 내게 넘겼다.


내가 판단하기로 아저씨는 공항에 가려면 그 플랫폼에 있으면 안 됐다. 휴대폰에 띄워 놓은 경로가 최적이 아니었다. 환승하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공항엔 왜 가는지 물었다. (그 순서대로였는진 모르겠다.)


아저씨의 대답은 대충 이랬다. ‘환전을 하려는데 오늘이 공휴일이라 은행이 영업을 안 한다. 그래서 누가 내게 이 (폰 화면의) 경로를 주며 인천공항에 가서 환전을 하라고 알려줬다. 그런데 한국어를 못 읽으니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다.’


은행이 쉴 때 환전이 가능한 곳이 공항뿐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지만 하여튼 공항에 간다니 공항 가는 법을 알려줬다.


그리고 환승하는 곳까지 동행하며 대화를 좀 나눌 생각으로 나를 따라오시라고 했다.


어디 출신이시냐고 물었다. ‘sh’ 같은 소리에서 느껴지는 영어 억양이 독일 사람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독일 사람이었다.


나더러 어디 사람이냐길래 한국인이라고 독일어로 말했고, 영어를 어디서 배웠냐길래 한국에서 배웠다고 또한 독일어로 말했다.


독일어 ‘In Korea’같은 게 영어랑 (표기는 완전히 똑같고, )발음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비슷해서 그런지 아저씨는 내가 독일어로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못 느꼈거나 확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 독일어 발화에 계속 영어로 응수하다가 어느 순간 오, 독일어를 아냐며 독일어로 막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 XX어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 대답은 역시 ‘a little.’로 하는 것이 국룰이다. ein bisschen이라고 대답했다. (근데 독일어는 ㄹㅇ 너무 쪼끔임)


독일 어디에서 오셨냐고 하니까 ‘Holland 근처’, ‘Nordwest’ 같은 말을 하시면서 정확한 지명을 얘기하셨는데, 당시엔 똑똑히 들었지만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인구가 적은 작은 마을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일은 수도 베를린이래 봤자 인구가 300만이 안 된다든가, 독일은 도시나 마을 인구가 한국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런 이야기를 막 독일어로 하셨다.

솔직히 못 알아들은 게 되게 많았는데, 한국은 서울인구만 해도 구백만이지만 독일은 뭐 인구가 백만 명 넘는 도시가 전국에 몇 개밖에 없다? 그런 얘기인 것 같아서 ‘in ganze Deutschland?(독일 전체에요?)’라고 리액션을 했더니 'in ganz Deutschland.'라고 대답을 하셔서, 아, 자연스러운 리액션 성공이구나, 다행이다, 했다.

(그땐 아저씨도 ganze라고 하신 줄 알았는데 파파고 돌려 보니 ganz가 문법에 맞는가 보다? Ganze는 여성이거나 복수거나여야 하는 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계속 독일어 토크를 이어가시는데 솔직히 슬슬 독일어 듣기 능력에 한계가 왔다. 죄송한데 못 알아듣겠다고 영어로 말했다. 내가 먼저 독일어로 전환해 놓고 무책임하게도 ㅋㅋ


그랬더니 영어로 다시 설명해 주시기를, 독일엔 한국과 달리 산이 많이 없어서 인구가 널리 퍼져 있댔다. 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는 국토의 몇십 퍼센트가 산지랬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아서 끄덕끄덕하고 인구밀도가 높지 않군요, 그건 좋네요, 하며 반응을 했다.


아저씨 왈 국토에 산지가 많아서 인구가 몰려 있는 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대만도 비슷하고 일본도 비슷하단 이야기를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다 보니 공항 가는 환승 노선 승차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전철을 타서 몇 개 역을 지난 다음에 김포공항역에 내려서 공항철도로 환승하면 인천공항에 갈 수 있다고 다시 알려드렸다.


전철이 올 때까지 대화를 더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곧장 떠나지는 않았다.


독일인 아저씨가 ‘아까 그 분은 영어가 그렇게 편하지 않았는가 보다’며 새로 운을 띄웠다.

‘뭐 한국 사람은 대다수가 영어 소통을 그렇게 편하게 느끼진 않을 거다’라는 식으로 대답을 했더니,

‘여긴 도시라 그나마 나은 거다. 시골에서 영어 쓰는 사람 찾기는 정말 힘들다’란 말이 돌아왔다. 한국서 시골도 가 봤다는 거다.


독일인 아저씨가 무슨 일로 한국 시골엔 또 가 봤나 싶어서 한국에서 뭘 하시냐고 물었다. 기억이 흐릿하긴 한데 아저씨가 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해서 여행객이 아니라 한국에 오래 사는 사람이겠거니, 했던 거 같다.


그랬더니 ‘난 여행 중이고, 일본에서 넘어왔으며, 그 전엔 대만에 있었고, 그 전엔 필리핀에 있었고, 그 전엔 아프리카를 싹 돌아봤고, 다시 그 전엔 유럽을 싹 돌아다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 대만도 한국처럼 산지가 많단 말은 그래서 나왔는가 보다.)


진심 어린 감탄과 함께, ‘그럼 Afro-Eurasia(?)를 다 돌아보신 거군요’라고 하니까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 세계여행을 42년째 하고 있는 거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니 아프로유라시아가 다가 아니고 남미도 돌아다녔다고 했던 것 같다.)


더욱 놀라웠다. Drew Binsky라든가 ‘빠니보틀’처럼 ‘세계 모든 나라 가 보기’ 챌린지를 하는 유튜버는 본 적이 있지만 그들은 다들 젊은 사람들이고,

40년이 넘게 쭈욱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니! 이런 사람은 인터넷에서를 포함해서 거의 처음 본 것 같았다.


아저씨는 아마 ‘세계여행을 하되, 들르는 나라 각각을 깊이 있게 경험한다’라는 생각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남미였나?) 자신처럼 세계여행을 하는 여성을 만났다고 한다. 그 사람은 1년 반 만에 세계 모든 나라를 다 다녔으며 그래서 한 나라에 겨우 이틀~사흘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한 번 가 본 나라는 (이미 다 겪었으니?) 절대 돌아가지 않는댔다고, 그런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그런 여행 스타일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태도가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한국 시골에도 가 보고 하셨구나, 하고 납득이 되었다.



자,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아마 다들 똑같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40년이나 세계여행을 할 돈이 어디서 난 걸까?

(이런 궁금증에는, ‘방법만 있다면 나도 좀 해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ㅋㅋ)


나도 그게 궁금했다.


'How do you afford it? Genuine curiosity.'라고 물었다. (완벽히 문법이 정확하거나 상황에 맞는 영어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돌아온 대답은 과연!


.

.

.


'That's my secret.'


ㅋㅋ...

뭐 무슨 비결인지 몰라도 어차피 순순히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런 대답에 딱히 놀라거나 실망하지도 않았고 더 캐물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순간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서양 여행객들이 자기가 여행하며 찍은 조잡한 사진 같은 걸 길거리에서 아주 비싸게 팔아서 (사실상 구걸을 통해) 여행 경비를 조달한다는 문제적인 이야기.


(근데 지금 생각하면 저렇게 사실상 구걸과 같은 방법으로 40년이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 내가 뭔가 꺼림칙한 방향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치만 합법적인 방법이야(but it's legal이랬나)’라고 덧붙이길래 같이 웃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세계여행을 즐기는 삶이 좋아 보이겠지만, 실은 고향에 사는 가족들과 잘 만나지도 못하니 외롭다고 하셨다. 연락은 나름 하고 지낸다, 당장 어제도 화상통화를 했다고 하면서도 그 점이 영 외로운 모양이었다.


이때쯤 전철이 들어오고 있어서 좀 정신이 없었다. ‘연락이 잘 된다니 좋네요’라니까 ‘하나도 안 좋고 외롭다’는 식으로 대답하셨는데 내가 뭔가 놓쳤던 거 같기도 하다.


몇 개 역을 지나서 김포공항역에 내리시면 된다고 다시 확인을 해 드렸는데, 생각해 보니 환전하러 가는 거면 굳이 인천공항에 갈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김포공항에도 국제선이 있으니까 환전을 해 주지 않겠느냐, 가서 한번 확인해 보라고 했다. (이때 얘기한 게 맞나)


몇 개 역을 지나서 내리면 된다고 말할 때 잠깐 독일어를 섞어 봤는데, 영어 'stations'를 생각하고 ‘Statione’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신혼여행 때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줄곧 들었던 ‘다음 역’ 표현은 'nächster Halt'였다. (nächste인 줄...) 복수형은 Halte.

그리고 Bahnhof라는 말도 생각난다. 중앙역은 Hauptbahnhof. 이 말도 신혼여행에서 자주 들었다. 복수형은 Bahnhöfe인데, 왠지 몇 개 가서 내리란 말 할 땐 이건 안 쓸 것 같은 근거없는 느낌이 든다.

뭐가 맞는 말이었는진 모르겠다. 뭐 어차피 영어로도 말하고 독일어로도 말했으니 제대로 알아 들으셨을 거다.


아무튼 그렇게 이름 모를 독일 백발 아저씨는 전철에 몸을 싣고 떠나갔다.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저씨를 보내고 본가로 향하면서 아내에게 방금 이런 일이 있었다고 자랑을 하는데

(이 글은 그때 보낸 자랑 카톡을 보면서 기억을 되살려 쓰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40년이나 세계여행을 하다니 엄청난 금수저이거나 막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크게 성공한 사업가는 아니었을까! 이름이라도 물어봐 둘 걸 그랬나?’


아쉽게도 통성명을 하지 못해서 검색해 볼 수는 없다.


하여튼 재밌는 경험이었다. (내가 쓰는 글에 자꾸 이 문장이 나오는 게 좀 초딩 일기 같아서 별론데 다른 말을 못 찾겠다. ㅋㅋ)


요즘처럼 외국어 공부의 가치가 떨어지는 듯한 시대에, 아직은 직접 영어로 대화하는 편이 파파고를 거치는 것보다 편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끝.



https://m.blog.naver.com/ks1127zzang/223817976567


https://m.blog.naver.com/ks1127zzang/222751462662

(이건 좀 반성해야 하는 경험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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