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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오 김 Jul 04. 2023

광동어와 베트남어 한자음의 성조 대응 - 日과 一

feat.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

광동어를 공부하는 재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자의 광동어 발음을 다른 언어와 비교해 보는 게 특히 재미있다. 

분절음(자음과 모음)의 비교도 재미있지만, 성조의 비교가 또한 아주 흥미롭다.


광동어와 표준 중국어(Mandarin)와의 성조 비교도 재미있겠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나 생각해 본 바가 없고, 

광동어처럼 한자음에서 입성을 유지하고 있는 (-k, -t, -p 받침이 남아 있는) 베트남어 한자음과 광동어를 비교하는 게 재미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날 일日과 한 일一은 한국 한자음으로는 모두 '일'이다. (일종의 '성조(?)'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광동어와 베트남어에서도 日과 一의 자모음 구성은 서로 같다. 광동어에서는 둘 다 '', 베트남어에서는 둘 다 ''이다. 

그러나 광동어도 베트남어도 성조를 통해 둘을 구분한다.


은 광동어로 jat6 (낮은 음)

은 광동어로 jat1 (높은 음)


은 베트남어로 nhật (낮은 음)

은 베트남어로 nhất (높은 음)


직접 들어 보면 각각 높낮이도 서로 유사해서 아주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은 (누가 알려주기 전에) 직접 발견(?)했기에 더욱 흥미를 느끼고 기억에 오래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런 건 그냥 광동어랑 베트남어를 조금만 구경하다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왜 저런 현상이 생겨났는지, 예외는 무엇이 있으며 예외는 또 왜 생겨났는지 세세하고 아름답게 정리해 왔다. 

(궁금한 사람은 한어음운학, 중국어음운학, 중고한어 등의 키워드를 찾아보면 된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가 내게 그런 내용을 더 자세히, 더 많이, 더 잘 정리된 형식으로 알려주었다면, 

광동어와 베트남어가 日과 一를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구분한다는 사실은 내게 그만큼 흥미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베트남어를 직접 배우고 광동어를 직접 배우면서, 내가 배운 베트남어와 내가 배운 광동어에서 내가 느낀 사실이기 때문에 그만큼 깊이 기억에 남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듀오링고로 광동어를 공부하다가 문득 떠올라서 적어 본다.





그러면 광동어와 베트남어는 왜 을 낮은 음으로, 을 높은 음으로 발음하게 되었을까?

그 변화의 정확한 동인이나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조금씩 주워들어 온 지식의 파편들을 이용해서 표면적인 패턴을 찾아볼 수는 있었다. (보다 자세한 이유를 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광동어와 베트남어 한자음의 공통조상이 되는 중고 한어(Middle Chinese)에서 日과 一의 자모음 구성은 서로 달랐다.

日은 대략 '닛', 一은 대략 '잇'이었다. 초성(성모)이 각각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 한자음(오음)에서 日이 'にち(니치)'이고 一이 'いち(이치)'라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현대 표준 중국어에서 日는 rì이고 一는 yī인 것도 중고한어의 이러한 초성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광동어에서는 원래 '닛'이었던 日이 초성의 'ㄴ'을 잃고 (모음~운복 또한 바뀌면서) jat('얏')이 되어서 원래 '잇'이었던 一과 발음이 같아졌고, (정확히는 一 또한 초성의 성문파열음을 잃었다)


베트남어에서는 반대로 원래 '잇'이었던 一이 초성에 'ㄴ'을 얻고 (모음~운복 또한 바뀌면서) nhât('녓')이 되어서 원래 '닛'이었던 日과 발음이 같아졌다.


그러나 日과 一 모두 성조를 통해 중고한어 초성의 원형을 반영하고 있다.


처음에 중고한어에서 평平, 상上, 거去, 입入 네 개로 구분되던 성조는 각 한자음의 초성에 따라 각자 다양하게 나뉘고 합쳐졌다. 주로 b, d 등 유성(장애)음 초성m, l 등 비음이나 유음 초성p, t 등 무성(장애)음 초성의 세 가지로 나뉘었다.

 

영문 위키백과의 Four tones (Middle Chinese) 문서에는 현대 중국어의 다양한 방언(또는 Sinitic Languages)에서 그러한 성조의 분화가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방대한 표가 실려 있다.


그 중에 광동어와 베트남어만 보자면 이렇게 되고,



문제가 되는 과 은 위에서 각각 파란색과 주황색 네모 박스의 내용에 해당한다.


영어 위키백과 Four tones (Middle Chinese) 문서에서 발췌

중고한어에서

의 초성은 성문 파열음이었는데, 이것은 위 표에서 'voiceless'에 해당하고 (주황색)

(一의 모음이 단모음이었다는 정보가 추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八'칸이 아니라 '北'칸을 봐야 한다.)

의 초성은 'ㄴ'과 비슷한 발음이었는데, 이것은 위 표에서 'voiced son(orant)'에 해당한다 (파란색)


주황색 영역에서 광동어의 성조 '5'와 베트남어의 성조 '45'는 둘 다 높은 음으로서 위에서 말했던 '一jat1'과 '一nhất'의 성조를 나타낸다.

파란색 영역에서 광동어의 성조 '2'와 베트남어의 성조 '21'은 둘 다 낮은 음으로서 위에서 말했던 '日jat6'과 'nhật'의 성조를 나타낸다.


요컨대, 광동어와 베트남어의 日과 一은 중고한어 시기의 초성을 그대로 갖고 있지는 않지만 

중고한어 시기의 초성이 성조에 남긴 흔적은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로 레퍼런스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점으로부터 각각의 초성 변화가 초성에 의한 성조 분화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en.m.wikipedia.org/wiki/Four_tones_(Middle_Chinese)#Distribution_in_modern_Chinese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KLO, Korea Linguistics Olympiad)의 21/22년도 대회에서 광동어와 베트남어의 한자음을 대조하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 홈페이지에 기출문제가 공개되어 있다.

21/22년도 문제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정답지는 여기

광동어와 베트남어 한자음 문제는 4번 문제이다. 머리 쓰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한번 풀어 보아도 좋겠다.


https://krlo.co.kr/problems





덧붙임


1. 위에서 음절의 첫소리를 주로 '초성'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한국어 문법 용어가 익숙한 독자를 위한 표현이고 중국어 성운학의 맥락에서는 '성모(聲母)'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일반적입니다. 둘의 개념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저는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초성'이라 하면 '중성'과 '종성'이 함께 있는 삼분지 수형도가 떠오르는데 '성모'라 하면 운복과 운미가 포함된 '운모(韻母, rhyme)'가 함께 있는 이분지 수형도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이렇게 각 용어가 환기하는 개념 틀의 맥락이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습적으로 '초성'은 주로 한국어에 대해서, '성모'는 주로 중국어 성운학에 대해서 쓰이는 용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2. 베트남어와 광동어는 계통상 서로 연관성이 없는 언어입니다. 베트남어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남아시아어족, Austroasiatic) 몬-크메르어파(Mon-Khmer) 비엣므엉어군(Viet-Muong)에 속하지만 광동어는 한장어족(중국-티베트어족, Sino-Tibetan) 중국어파(Sinitic) 월어군(Yue)에 속하는 언어입니다. 즉 둘 사이의 공통 조상을 인정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 의견입니다. 다만 베트남어가 한국어처럼 중국어로부터 많은 어휘를 들여왔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가 가능한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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