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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오 김 Jun 04. 2023

[과학철학] 반례는 모두 반례인가?

해왕성의 발견과 뉴턴, 그리고 언어학자 크로프트의 '방법론적 기회주의'

과학철학은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사이비 유사과학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이 많다. ('과학의 자격')

언어학은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표방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과학철학의 이러한 질문은 언어학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관련하여, 언어학 블로그에서 다소 뜬금없지만 천문학의 역사 이야기를 해 보자.


인류에게 알려진 태양계가 천왕성까지였던 시절,

뉴턴 역학 이론에서 예측되는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해 보면 실제로 관측되는 천왕성의 궤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천왕성 궤도에 대한 당시 뉴턴 역학의 예측치와 실제 관측치의 이러한 차이에 대해 서울대 장대익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천왕성 궤도에 대한 실제 관측과 뉴턴 법칙에 의한 계산은] 오차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측이 틀렸거나 아니면 뉴턴의 행성 법칙이 틀렸거나 둘 중 하나일 정도로 차이가 컸다. ...

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장대익, 2008:89쪽)


당시에 접근 가능했던 정보만 고려하면,

뉴턴의 이론이 실제로 관측된 현상과 양립할 수 없을 만큼 잘못된 예측을 내놓았다는 것이다.[1]


칼 포퍼가 과학성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반증주의'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과학자 집단은 이러한 모순을 발견했으니 뉴턴의 역학 이론을 폐기하고 천왕성 궤도를 더 잘 설명하는 대안 이론을 탐색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과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순을 일단 '무시'하면서 뉴턴 이론을 살려둔 것이다!


그들이 천왕성 궤도를 두고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에 대한 반례나 위협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과학적 방법론'이란 말에 통상 결부되는 이미지처럼 객관적 데이터나 경험적 증거, 그리고 일관된 논리에 근거한 합리주의에 의하여 결론지은 것이 아니라

'뉴턴의 권위'라는 논리 바깥의 요인으로 편향된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뉴턴이 틀릴 리가 없다는 과학자 집단의 신념은 급기야 '천왕성 너머에 우리가 모르는 행성이 하나 더 있다고 일단 한번 생각해 보자'라는 '가정'으로 이어졌다.


과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이러한 가정 아래에서

이 미지의 행성이 어디에 있다고 '상상'해야 비로소 뉴턴의 이론과 실제 천왕성의 궤도 관측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될지 계산하였고,

결국 뉴턴 이론의 권위를 지켜 줄 이 가상 행성이 있을 걸로 예상되는 지점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로 그 위치와 거의 같은 곳에서 새로운 행성, 해왕성이 실제로 관측/발견되었다.


천왕성과 해왕성


이렇게 '펜 끝만으로 행성을 발견한'[2] 사건은 놀라운 일이며, 한편으로 그 끈기가 가져온 성공에 대해 같은 인류로서의 묘한 뿌듯함과 지적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과학적 합리성이나 논리성에서 벗어난 '믿음'에 기초한 발견이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상술하였듯이, '천왕성 바깥에 행성이 하나 더 있을 것이라 믿어 보자'라는 가정은 당시로서는 어떤 독립적 증거에도 바탕을 두지 않은, 천왕성 궤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뉴턴 이론의 권위를 지켜내는 것.


여기에 대해 장대익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과학자들은] 반례들에 적당히 눈을 감을 줄 아는 능구렁이들이다. 문제를 무마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보조 가설들을 넣어보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장대익, 2008:90쪽)


***

재미있게도,

이후에 수성의 궤도에도 유사한 문제가 발견되어서 Vulcan이라는 가상 행성의 존재가 가정되었다고 한다.[4]

그러한 가정을 제안한 사람은 해왕성 발견에 기여한 수학자 중 한 명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해왕성 발견에서 통했던 방법이니만큼 한 번 더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데에 더 자신이 있었을 듯하다.

그러나 Vulcan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부존재가 입증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대신 뉴턴 역학을 대체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수성 궤도 문제가 해결되었다.

***


참고로 뉴턴 역학에 대한 이러한 유사반례는 천왕성 궤도 문제 말고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달의 공전 주기'와 '음파의 속도' 모두 처음에는 뉴턴 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심지어 뉴턴 자신 또한 그러한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프린키피아를 발표했다.

(장대익 교수님의 책에 좀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좀더 과거로 돌아가 보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천문학 패러다임이 바뀌던 시점에도 유사한 문제가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안했던 시점에는 지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 현상이 오히려 천동설에 대한 반례보다도 더 많았다고 한다.


물론 그러한 특이 현상이 결국은 지동설에 대한 반례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지금의 과학 지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코페르니쿠스보다 나중 세대의 인류가 전에는 몰랐던 여러 정보에 접근하는 능력을 얻으면서 해결된 문제였을 뿐,

코페르니쿠스 자신에게는 그러한 특이 현상이 자신의 이론에 대한 반례가 아니라고 확인할 만한 경험적 근거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즉 코페르니쿠스도, 그의 지동설을 따랐던 자들도 일단은 지구가 돈다고 '믿고 본' 셈이다.


어쨌든 흥미롭게도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이 '지적 솔직함'을 위해 저러한 '반례'를 두고 자신의 이론을 곧바로 폐기하였다면

과학의 발전은 이보다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리하자면,

과학 이론의 자격과 합리성에 대해 엄격한 반증주의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어떤 이론에 대하여 똑같이 반례가 되는 듯 보이는 특이현상(anomaly)이 있을 때

어떤 '반례'는 다른 반례보다 이론에 덜 치명적이며,

잠재적인 변인을 다루는 보조 가설을 이론에 추가하면 그러한 반례들은 더이상 반례가 아니게 될 수 있다.


잠재적인 변인은 말 그대로 잠재적일 뿐이고 당장에 직접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반례가 진짜 반례이고 어떤 반례가 가짜 반례인지 미리 알기는 어려우나,

과학자 집단은 마치 그들이 반례의 치명성을 선험적으로 구별하여 판단할 수 있다고 신념하는 것처럼

반례를 주관적으로 (논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취사선택하고는 한다.

천왕성 궤도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의 이러한 신념과 행동이 새로운 행성의 발견을 앞당기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수성 궤도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신념과 행동이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다시 언어학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상의 이야기를 들은 언어학도는 아마 곧바로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촘스키언 언어학 이론에 대한 반대자들의 공격은 주로 그 이론이 실제 언어 데이터가 아닌 '선험적인(aprioristic)'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자세한 이론 내적 논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거시적인 차원에서 그나마 들어 본 것으로 세 가지를 꼽자면,

(1) 아기가 언어를 배우기에 부모가 제공하는 언어 데이터는 양적/질적으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자극의 빈곤 Poverty of the Stimulus),

(2) 인간의 언어가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거의 같다는 것,

즉 모든 언어의 문법은 즉 몇 가지 매개변수에 의한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나,

(3) 그러한 보편문법을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머리에 가지고 있다는 것(생득성 Innateness 가정)에 대해 그런 비판이 많다.


물론 촘스키 지지자들이 그러한 '가정'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반대자들의 눈에는 그런 해명조차도 임시변통의(ad hoc) 보조 가설을 난잡하게 덧붙여 언어 데이터를 촘스키 이론에 겨우 끼워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첫 번째 주장, 즉 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 듣는 발화가 언어습득 자료로서 부족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의견으로 Pullum and Scholz (2002)의 Empirical assessment of stimulus poverty arguments 등이 있고,


두 번째 주장, 즉 인류의 모든 언어는 보편문법에 정의된 보편성의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Nicholas Evans와 Stephen C Levinson이 2009년에 발표한 논문 The Myth of Language Universals 등이 있으며,


세 번째 주장,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보편문법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의견으로

Michael Tomasello가 2003년에 발표한 저서 Constructing a Language: A Usage Based Theory of Language Acquisition 등이 있다.


(나는 아직 이상의 세 논저와 그에 대한 촘스키언 입장에서의 재반박을 하나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나 자신의 의견은 내 봤자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반대자들의 눈에 비치는 촘스키언 언어학자들은

마치 뉴턴의 권위에 대한 절대 신뢰로 미지의 행성을 상상해 냈던 과학자들과 같이

촘스키의 어떤 주장들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고 연구를 계속하다 보면 결국은 촘스키가 옳았음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듯하다.


과거에 비해 언어학계에서 촘스키의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물론 과거만큼 절대적인 것이 아닐 뿐,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이겠으나)

수많은 언어학 이론들이 서로 경쟁하는 (게다가 이제는 컴퓨터까지!) 군웅할거의 시대에

이러한 지지자들의 믿음이 결국 해왕성의 발견과 같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지,

아니면 천동설이나, 플로지스톤[3]이나, 아직도 찾지 못한 가상 행성 Vulcan에 대한 믿음과 비슷한 것이 될지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한편 촘스키와 거리가 먼 기능주의 언어학, 인지언어학, 언어유형론 연구자인 William Croft는 자신의 저서 Radical Construction Grammar에서 "방법론적 기회주의"라는 것을 비판한다.


이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모든 반례를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영어에서 '주어'라는 개념의 필요충분조건, 즉 주어의 자격을 대략 아래와 같이 정의하는 가상의 언어학 이론이 있다고 하자. (당장의 논의를 위해 편의상 얕은 직관에 부합하도록 만들어낸 가상 이론이며 그다지 엄밀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동사 바로 앞 명사구' 같은 선형적 순서에 대한 정보는 실제 영어학 이론에서 잘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a. 동사 바로 앞에 나오는 명사구

b. 동사의 수(단수형/복수형)를 결정짓는 명사구

c. Tag-question(부가의문문)을 만들 때 사용되는 명사구


이러한 주어 이론에 기반한다면,

'There is a wug'와 'There are wugs' 같은 문장에서는 주어가 무엇일까?

'there'가 주어인가 아니면 'a wug / wugs'가 주어인가?


(1) 'there'는 주로 주어가 나타나는 위치에 나오고, 'there is a wug, isn't there?'과 같은 tag question을 만들 수 있다. 즉 a조건과 c조건을 충족한다.

(2) 'a wug / wugs'는 동사의 수를 결정짓는 일치 주체이다. 'a wug'가 단수이기 때문에 'is'도 단수이고, 'wugs'가 복수이기 때문에 'are'도 복수이다. 즉 b조건을 충족한다. (더불어 there보다 의미적으로 더 실체적이지만, it rains같은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의미적 실체성은 주어의 요건이 되지 못한다.)


'there'가 주어라고 말하면 (2)에 의해 위 주어 이론의 반례가 되고,

'a wug / wugs'가 주어라고 말하면 (1)에 의해 위 주어 이론의 반례가 된다.


Croft가 정확히 there is 구문을 예시한 것은 아니나

이러한 상황에서 'there'와 'a wug / wugs' 중 어느 쪽을 주어라고 말하든지

Croft가 비판하는 방법론적 기회주의Methodological Opportunism가 된다.


왜냐하면 'there'를 주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반례(2)가 (1)보다 덜 중요한 것이라고 선험적으로(즉 별다른 이유 없이) 가정하고 (2)를 무시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적으로 솔직한 언어학자라면 해당 문장에서 주어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거나, 주어 개념을 논하는 위의 이론을 전면 수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주어 개념을 폐기하거나 해야 한다.


처음 Croft의 RCG를 읽고 이러한 생각에 굉장히 매료되었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과학사를 살펴 보면

어떤 반례는 다른 반례보다 더 중요하고 치명적이며

어떤 '반례'는 다른 반례보다 가짜 반례, 잠정적인 반례일 가능성이 더 높다. 보조 가설과의 결합과 새로운 경험적 증거가 언젠가 이를 밝혀준다.


그런 맥락에서 일단 대세는 there가 주어라는 의견인 것 같다.

디테일한 이론은 프레임워크마다 다르겠으나 우선 외대 박정운 교수님의 수업에서 들었던 설명에 의하면 there가 주어인 이유는 아래와 같다.


There tend to be more wugs in the morning

과 같은 문장에서 'more wugs'는 종속절 안에 있는데, 영어에서 종속절 안에 있는 요소가 상위 절인 주절의 주어가 될 수는 없다는 일반 원칙에 의해, 이때의 tend가 more wugs에 직접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충분한 설명이 아니라고 느껴지지만 우선 넘어가자. 이를테면 종속절 안의 요소도 주절의 주어가 될 수 있다는 보조 가설을 수립하는 일은 왜 안 되는지도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절 동사 tend의 수가 종속절 속 명사구에 일치하는 (듯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anomaly는 왜 반례가 아니라 유사반례에 지나지 않는가?


그것은 종속절 속 명사구가 there에다가 자신의 수 자질을 넘겨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조가설의 등장)

그러니까 동사 tends/tend나 is/are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결정짓는 것은 'a wug / wugs'가 아니라,

'a wug / wugs'로부터 단수라는 정보 또는 복수라는 정보를 넘겨받은 'there'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 자질 넘겨주기'라는 이론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일은 관계대명사 who나 which의 수일치로부터 독립적으로 요구된다(independently motivated).

'a linguist who loves languages'나 'linguists who love languages'에서는 동사 'love / loves'의 수를 결정짓는 것이 관계대명사 who이고,

who에는 자기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단수/복수 값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선행사 'a linguist / linguists'로부터 그러한 정보값을 넘겨받아 동사의 수를 일치시키는데,

there 또한 이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요구된다는 말이 보조 가설을 완벽히 정당화하는지에 대해 회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두 가지 이상의 현상만 설명할 수 있으면 무조건 보조 가설을 만들어도 되는가?)


일단 이상에서 괄호에 달아 둔 토를 무시하고 보면,

Croft가 비판하는 언어학자들의 'Methodological Opportunism'은 어쩌면 모순적인 기회주의가 아닐 수도 있다.

A라는 패러다임(이론)에선 x가 anomaly가 되고 B라는 패러다임에서는 y가 anomaly가 될 때

x와 y 중에 천왕성 궤도 문제와 해왕성의 존재처럼 보조 가설 및 새로운 정보와 결합하여 해결될 가능성이 더 높은 anomaly가 어느 쪽인가를 당대의 언어학자 집단이 나름대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늘 맞지는 않더라도

이성적이고 훈련되었으며 자격이 있는 언어학자 집단이 선택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성공률이 있을 것이다.


(종종 오해되는 바와 달리, <과학혁명의 구조>를 집필한 토머스 쿤의 주장은 이성을 통한 과학의 진보를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1] 흥미롭게도, 한국어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의 '해왕성' 문서를 보면, 당시 뉴턴 역학의 예측치와 실제 관측치의 차이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다. 심지어 '작은 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서술만 읽었을 때는 과학자 집단의 반응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다.


[2] 한국어 위키백과 '해왕성의 발견' 문서에서 인용

"이 사건은 19세기 과학의 눈부신 성과였으며 뉴턴의 만유 인력 법칙을 극적으로 확인하는 실례가 되었다. 프랑수아 아라고의 말에 따르면 르베리에는 "자기 펜 끝으로" 행성을 발견한 셈이 된 것이다."


[3] 써 놓고 찾아 보니 18세기 당시에 플로지스톤과 라부아지에 중에 과학적으로 더 많이 옳았던 것은 사실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 접근 가능했던 정보를 토대로 하면 플로지스톤도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며,

플로지스톤 이론의 잘못됨은 당시 라부아지에 이론의 잘못됨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자세한 것은 케임브리지대 장하석 교수의 <물은 H2O인가?>를 참조. (나도 아직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4] 수성 궤도와 가상 행성 불칸에 대한 내용은 아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약간 더 검색을 해 보았다.)

장대익 교수의 책에도 잠깐 소개되는 콰인(Quine)의 보조가설 희생 문제에 대해서도 정리되어 있다.

https://m.blog.naver.com/wjdgksmf99/222845149219




+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글을 써도 되나 했는데, (어차피 항상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쓰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남에게 보인다는 생각에 쓰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면서 몰랐던 걸 알게 되는 효과가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앞으로도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면 일단 써 봐야겠다.


++ 언어학 수업을 들을 , 어떤 교수님은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라는 물음을 이어가며 파고 내려가다 보면 어딘가에서는  이상 이유를 물을  없는 '믿음' 나온다' 하셨고, 다른 교수님은 '누구나 과학사를 공부해 보아야 한다' 하셨다. 오늘 다룬 이야기와 같은 의미에서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떠올려 보니 재미있는 말이다.


+++

과학철학에서 말하는 보조 가설과 임시방편적 가설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는 글을 찾았다. 아직 제대로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미지의 행성을 상정한 일이 그 자체로 ad hoc은 아닌 것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https://m.blog.naver.com/cock25king/22206731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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