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인의 기록 5일 차 <그날의 기억>
내게도 소개팅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학원 운영에 영 소질이 없었던 내가 학부모들의 끊임없는 요구와 불만에 시달리며 한참 고전을 겪고 있을 때였다. 속 깊은 위층 영어선생님과 커피를 마시던 중, 그녀의 지인 이야기가 나왔다. 여러 개의 학원을 운영하며 소위 성공을 거머쥔 서울대 출신 남자. 영어샘은 그 남자를 내게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의도는 그랬다. "그냥 친구처럼, 정보도 나누고 가끔 술 한 잔 할 수 있는 좋은 사람 있으면 좋잖아요."
서울대, 성공한 사업가. 솔직히 조금은 솔깃했다. 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첫 만남 장소를 동네의 유명한 맥주집으로 정했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내 차림이 나풀나풀 하얀 원피스였던 기억으로 미루어. 어떤 기대감이었는지, 약속 전날부터 기분 좋았던 나는 낯선 남자 앞에서 한 잔 이상의 술은 절대 마시지 않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하며 약속 장소로 갔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남다른 욕심과 집착의 대상은 딱 두 개였다. 남자와 책.
둘 다, 나의 인식 체계 안에서 뚜렷하게 형체를 드러낸 욕망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소유욕, 맹렬한 집착. 확실한 고집.
남자.
사랑이라기보단, 거의 소유욕과 집착으로만 설명 가능한 기억들이 몇 번 있었다. 돌이켜보면, 과연 그와 내가 사랑을 하긴 했는지 이제 와 의심만 잔뜩 남는다. 염병할.
책.
평생 남자 없이 살아왔고, 게다가 돈벌이까지 시원찮았던 나는 책을 사 모으는 기이한 취향을 가졌다. 까칠함의 증거인지, 애틋함의 반증인지 ㅡ 새 책. 오직 새 책만 고집했다. 내가 산 책을 들고 도서관에서 누리는 꿀잠의 달콤함이란.
남이 침 바르지 못하는 내 책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내 인생 고유의 성역이고 풍요라, 우리 집엔 아직 읽지 않은 새 책이 많다.
좋은 사람에게는 책을 선물로 줄 뿐, 나는 남의 손 때 묻은 책을 빌려다 읽는 것조차 질색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고집스럽게... 읽고 싶은 책을 찾아 헤매고 이거다 싶은 책은 욕심껏 사 모으는 특이한 페티시. 남자는 가져 본 적 없지만, 애정으로 간직할 만한 인생 책 몇 권쯤은 곁에 있다. 그걸로 스스로를 위안해 보는 거다.
그렇게도 소중히 모아둔 책들은, 나를 크게 변화시키지 못한 채 결국 10년 주기로 선별되어 버려지곤 했던 것 같다.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향해 열리는 기분, 머리에 전구가 켜지는 짜릿함, 세로토닌 도파민이 꽃 피듯 피어나는, 남자와 책. 책은 언제든 가질 수 있지만 10년 후에 버려질 매혹적인 남자 하나는 ㅡ 정말이지 구할 수가 없다.
그날 나는 500cc 호프를 연거푸 3잔이나 꿀꺽꿀꺽 마셨다. 자기도취 심한 서울대 출신 성공남의 일장 연설을 듣게 될 줄 몰랐던 나는 고막이 파열되기 전에 술이라도 물처럼 들이켜야 했다. 그런 내가 만만해 보였던 걸까. 취기 오른 나를 훑어보던 그가, 기어코 물었다. "저, 남자로서 어때요?"
초면에 그런 말을 듣고 조용히 웃고 넘어갈 내가 아니다. 500 세 잔을 원샷처럼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 새끼야, 똥 마려우면 집에서 싸고 나왔어야지! 어디서 남자 운운이냐!..."
그 뒤 문장은 굳이 다시 기억해내지 않겠다. 그 밤이 채 가기도 전에, 영어샘에게 전화가 왔다. 그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서 듣다가 그만 끊어버렸다고. 그럼 말 다한거지.
그 '밤'. 단순한 하루의 끝이기도 하고, 여자로서의 기대가 스르르 접히고, 아줌마의 자의식이 깃털처럼 흔들렸던, 그 밤. 그 긴 감정의 격류. 하얀 원피스가 전부였던 밤. 그 끝은, 내 뒷모습만 기억했을 것이다.
하하하.
영어샘은 그 뒤로 그 서울대 출신 지인과 멀어진 것 같았다. 무식한 아줌마를 소개해줬단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