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건은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구조에서 비롯된다.
무례는 한 번의 일탈이지만, 반복되면 문화가 되고,
문화는 규범처럼 굴며,
규범은 결국 하나의 질서를 형성한다.
호텔 복도에서 오가는 짧은 언행들이
왜 특정한 유형의 인간만 재생산하는지-
그 메커니즘이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드러난 날,
나는 조직이 낳은 무례에 대한 글을 프로필 사진에도 올렸다.
그건 작은 저항이었다.
업무에서 발생하는 컴플레인은 대개 개인의 실수로 압축된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아도, 누가 겨냥된 것인지는 내부 구성원 모두가 안다.
보고의 어조, 배포되는 타이밍,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침묵과 시선들까지.
이 시스템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표적을 암묵적으로 지정한다.
나는 그 한복판에서
그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관찰 중이었다. 그러다
급기야 걸려들었다.
나는 곧 잘릴 수도 있다.
컴플레인은 ‘압박’과 ‘정리’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충분히 기능한다.
결정권은 위에 있고,
구조는 늘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이 프레임 안에서 개인의 의지나 능력은 부차적이다.
오늘은 도서관에 왔다.
이곳은 정보량은 많지만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좋다.
이런 중성적 공간이야말로 관찰하기에 적합하다.
책은 읽히지 않았지만
세계가 단선적 질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책들과 종이 냄새가 대신 알려주었다.
책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기록의 목적은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저 현재 상태를 표본처럼 남기는 일에 가깝다.
오늘의 표정은 피로도, 분노도 아닌
‘안타깝고 쓸쓸한 지속’이었다.
관찰자가 흔들리면 관찰 자체가 왜곡되지만,
그 정도의 흔들림은 괜찮다.
칼 세이건의 은유,
카뮈의 건조한 저항,
하라리의 구조 분석.
이 언어들은 오늘의 사건을 개인사가 아니라
사회적 사례로 변환시키는 도구다.
그래서 나는 이 책들을 골랐다.
오늘 읽히지 않아도 괜찮다.
문장의 존재만으로도 세계가 여전히 해석 가능한 곳이라는 사실이 유지되니까.
오늘의 요약은 단순하다.
무례한 개인보다
무례가 작동하도록 허용하는 구조가 우선 관찰 대상이다.
그리고 나는 그 구조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며
오늘을 기록했다.
아마 당분간 더 이어질 것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