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섰더니, 다음이 보였다.

MBA 마지막 장을 넘기며

by 지혜로운 사자

회사를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그만둔 건 '일'이 아니라 익숙한 속도였다는 걸.

거의 30년을 바이오 업계에서 살았다. 누군가에겐 한 줄로 정리되는 경력이겠지만, 내게는 매일의 표정이 달랐다. 어떤 날은 숫자가 사람보다 앞섰고, 어떤 날은 사람의 표정이 숫자를 바꿨다. 언제나 빠르게 판단해야 했고, 손에 잡히는 성과로 설명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잘하고 있다"는 문장이 "이대로 괜찮을까"로 바뀌었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았다. 내면에서 질문들이 생겼지만 대부분 다시 바쁘게 만들며 묻어두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일이 클라이맥스를 지나 극의 엔딩을 향해 달려갔고 결국 멈춰 섰다. 드디어 긴장의 끈을 놓고 깊은숨을 쉬었다.


MBA는 '상승'이 아니라 '정리'로 시작됐다


회사를 그만두고 핀란드 Aalto 대학의 EMBA 과정을 시작했다. 50대가 되어 MBA를 시작한 건 더 높은 직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소모되고 공허하게 비워진 나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시간을 갭이어라고 불렀다.

계획이 완벽했던 건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잠시라도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잡자."

프리랜서로 소소한 일들을 하며 하루를 만들었다. 거창한 프로젝트보다 작은 의뢰들, 큰 목표보다 오늘의 리듬. 그렇게 조금씩,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생활을 설계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출근이 사라지자 시간은 늘어났지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사라는 프레임은 때때로 숨 막히지만, 동시에 나를 지탱해 주는 뼈대이기도 했다. 그 뼈대가 사라지면 하루는 쉽게 흐트러진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보다 '규칙적'으로 살 필요가 있었다.

MBA 과정은 불안을 없애주지는 못했지만, 불안을 정리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50대의 공부는 '태도'였다

나는 20, 30대의 공부를 기억한다. 빨리 따라잡고, 빨리 앞서가고, 빨리 증명해야 했다. 40대는 확장이었다. 더 많은 이해관계, 더 넓은 팀, 더 복잡한 맥락. 그때의 나는 일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50대의 공부는 조금 달랐다. 이제는 더 많이 아는 것보다, 무엇을 버릴지가 중요해졌다. MBA는 내게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주입하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들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게 만들었다. 감으로 하던 판단이 프레임을 만나고, 센스로 넘기던 문제들이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나는 늘 "결정"을 먼저 했다. 그런데 MBA에서는 "질문"이 먼저였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질문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걸.


프리랜서로 일하며 공부한다는 것

직장과 MBA를 병행하는 이야기는 흔하다. 그런데 프리랜서로 소소하게 일하며 공부하는 건 조금 다른 종류의 체력을 요구한다. 누군가가 정해준 시간표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덜 해도 된다'는 유혹이 늘 옆에 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의지'로 하지 않기로 했다. 의지는 쉽게 소진된다. 대신 원칙을 만들었다.

1. 일단 시작한다. 준비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끝이 없다.
2. 배운 것을 내 경험에 붙인다. 이론은 공중에 떠 있으면 사라진다.
3. 오늘의 최소 단위를 지킨다. 30분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끊기지 않는 것.

이 세 가지가 나를 끌고 갔다. 갭이어의 공부는 내 가치를 증명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조립하는 공부였다.


동기들은 내 생각의 경계였다

MBA 과정의 가장 큰 수확은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었다. 동기들은 내게 거울이었다. 서로 다른 산업, 다른 언어로 살아온 사람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성공'을 말했지만, 더 자주 '불안'을 말하고 있었다.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해도 될까?"
"내 경험은 이제 어디에 쓰일까?"
"나는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걸까?"

이 질문들이 내 안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불안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변화의 징후라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한결 가벼워졌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남는 건 질문이다

이제 곧 MBA를 졸업한다. 1.5년간 치열하게 배우고 고민하고 연구했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은 대부분 이미 잊혔다. 결국 '성취, 명예, 명분'이라는 수식은 멋지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남는 건 결국 태도와 통찰력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한 문장만 남기고 싶다.
정답과 안정만 찾지 말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하자.


그래서 나는 지금, 창업을 준비한다

30년간 바이오 업계에서 보고 배운 것이 있다. 한국의 작은 바이오 기업들은 기술은 있지만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기 어려워한다는 것. 그 길을 연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내가 창업하는 회사 이름은 Sapileo이다. 지혜로운 사자라는 뜻이다. 바이오산업의 통찰력을 제공하고, 작은 기업들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AI와 데이터를 활용해 시장의 흐름을 읽고, 한국 바이오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리는 일.

MBA에서 배운 건 단지 경영 이론이 아니었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질문하고, 가설을 세우고, 작게라도 실행하는 태도였다. 그 태도로 이제 다음 챕터를 쓰려한다.


나는 요즘

발레를 한다. 흔들릴 때 중심을 다시 잡는 연습.
독서 모임도 한다. 남의 문장을 빌려 내 마음을 정리하는 연습.
그리고 글을 쓴다. 불확실함을 없애기 위한 글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한 글을.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다음이 막막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페이지에 있다.

정답 대신 질문을 선택하고 배움과 성장에 대한 경로 의존성을 만드는 것이 불안을 잠재우는 처방이 될 것이다.


#Aalto EMBA

#aSSIST

#M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