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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Dec 08. 2023

플라멩코 두엔데,

 - 몸과 마음의 판타지

  

플라멩코를 하면 살이 빠지냐고,

 물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빠진다.

그런데, 열심히 해야 한다.


내 맘속으로는 다이어트 댄스와 플라멩코 춤을 헷갈린 것은 아닌지를 물어보고 싶은 맘이 목까지 차오르기도 하는 데


에너지 소비가 커서, 살은 빠지겠지만, 체중감량만을 목적으로 시작하려 한다면  쉬운 춤은 아니어서,

목적을 이루기 전에 그만 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한다. 에라~~ 이러다 회원들 다 떠나갈라.


살이 빠지기보다는  근육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알려주고 싶다.

특히 하체 근육이 잘 단련된다.  

그 이유는 플라멩코에 싸빠떼아도

(zapateado: 플라멩코 댄스의 발테크닉) 때문이다.


싸빠떼아도는 플라멩코에서 발로 연주하는 퍼커션

이라고 보면 된다.

정확한 박자에 맞추어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뒤따르고,

그러다 보면 하체는 저절로 단련이 된다.


한국에서 한때 종아리근육 퇴축술이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한 것 같은 데,

내가 볼 땐 어이없게 여겨진다.

노화가 진행되면 근육은 자연스럽게 소실되게 마련

이고, 근육 한점 없는 밋밋한 다리는 휠체어를 오래 탄 환자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건강한 하체를 가지기 위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리드미컬한 플라멩코음악에 맞추어 플라멩코 발구름, 

싸빠떼아도 해보자!    

 

혹자는 플라멩코가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된다고도 한다.

맞다. 특히나 플라멩코는 감정을 밖으로

분출시키므로, 지극히 맞는 말이다.


플라멩코는 에너지를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러니 당연하다.

그러나, 춤배우다가 스트레스가 쌓일 수 도 있으니

그것도 감안하자. 일단 시도는 너무나 중요하다.


어~~ 나. 왜 자꾸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 같지?

모두 다 내 경험이어서 그렇다.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

물론 내가 완벽한 T가 아닌 것처럼

좀 더 기울어지는 의견이 있다.


몸을 움직임으로서 얻는 개운함은

 뇌가 정화되는 느낌까지도 든다.

이건 모든 운동이 그렇지 않을까 싶은 데

특히나 야외에서 하는 운동은 더 그럴 것이다.


가끔 나는 불편하다.

마치 인도에서 출발한 요가가 한국에서는

몸매를 좋게 하는 운동으로 여겨질 때,

왠지 앞뒤가 바뀐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해소이상의 그 무엇으로 접근한다면

더 깊은 세계로 갈 수 있는 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두가 각자의 목적이 다르니,

관여하지 말지니, 나는 내 길만 가자.



플라멩코에 두엔데(Duende)라는 개념이 있다.

스페인어사전을 찾아보면

el encanto misterioso e inefable del cante

라고 나온다.

"플라멩코의 신비하고 형언할 수 없는 마법과 같은 무엇"

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그냥 사전적 의미이고,

아티스트들 마다 저 마다의 두엔데의 정의는

살짝 차이가 있다.


두엔데라는 개념은  

스페인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가르시아 로르까가 생전에 강연에서 언급하며, 널리 알려지게 된 표현이다.    

요즘은 두엔데 보다는 깐테 혼도(Cante Jondo)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물론 둘의 의미는 다르다.

깐떼 혼도는 다른 편에서 얘기하자.


둘 다 플라멩코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 본질에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접근이라고 보면 된다.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폭발력 있는 에너지로 인해 소름이 돋으면서 정말 집중된 순간의 감동을  언급하곤 한다.  


사람들마다 다 표현이 다르지만,

나는 그분들이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페데리코 가르시아가 언급한  두엔데(Duende)가 느껴진 순간이라고

여겨진다.


무엇인가 너무 감동하면 내 피부가 섬뜩하게 닭살이

오르는 것 같은 맘과 몸이 함께 감동으로

전율하는 그 순간 말이다.

    

플라멩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살짝 비유해 보자면

두엔데는 마라톤에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같은 선에서 이해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섹스로 비유하자면,

”오르가슴의 극치” 이렇게도 대치해 본다.


사랑을 나누면서도 오르가슴을 느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것처럼,

항상 두엔데가 공연 중에 함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끔 플라멩코 애호가들은 누구는 두엔데를 가졌느니 못가 졌느니 이런 말들을 한다.

그러니까, 두엔데를 타고났냐 못 타고났냐로

구분 짓는 경우다.

다들 생각이 다르고, 아마도 두엔데라는 개념자체가 애매모호해서 다들 자신이 생각하는 '이럴 것이다'라는 나름의 개념을 쌓아가는 것 같다.


나도 여기에 하나 보태고자 한다.

살면서 재능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한다.

특히 일하는 분야가 예술에 관련된 분야라면 더 그렇다.

특히 재능의 있고 없음에 대하여, 좌절하기도 하고, 인내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재능이 없거나 부족하면 실제로 자존감은 한없이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재능은 살면서 쌓거나 만들어 나가면 될 것이다.

재능의 부족을 느끼는 것의 밀도는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한다.

아니면 가진 만큼의 재능으로만 예술을 할 수 도 있다.


실제로 천재들을 보면 내가 이것을 왜 하고 있나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예술에서의 감동은 타고난 천재만 줄 수 있는 가?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다.

재능과 두엔데의 비교가 너무 비약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나는 두엔데가 가지고 못 가지고의 개념이 아니라, 그걸 위해서 평생 가야 하는 어떤 목표지향점이라는 생각이다.


 언제 닿을지 모르지만, 그걸 위해 수련하고 훈련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일련의 프로세스의 통합인 것 같다.


그러한 작은 노력의 조각들이 모여서

내 인생의 총합이 될 텐데,

크고 작은 디딤돌과 같은 두엔데 들을 모아서 제대로 된 두엔데로 가는 과정을 즐기고 싶다.


한국춤의 살풀이를 감상하다 보면 절제된 묵직함을 느낀다.

감정을 눌러 눌러 가루가 되고, 돌이 되어 나온 그 응축된 에너지를 한 가닥씩 뽑아내는 느낌이 든다.

마치 신부가 첫날 밤 족두리를 벗고 비녀를 풀고, 저고리가

풀어지고, 마침내 속치마를 벗기까지의 과정이랄까?


그에 비교하면 플라멩코는

당당하게 가슴골을 깊게 드러내고,

눈을 똑바로 주시한 채로 상대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짝다리를 한 채로 담배를

물고 치마를 휘날리다가 남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술을 훔치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과감한 여자와 같다.

감추지 않고 그대로를 폭발시켜 버린다.


살풀이가 한에서 시작하여 신명으로 끝을 낸다면,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의 정서 안에서 로르까의 말처럼

“내부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힘으로 순간적인 영감이 발휘된” 그 무엇일 것이다.

로르까의 문학적 퐌타지에 살풀이 옷을 입혀,

내 몸뚱이로 표현해 보고 싶다.

나의 그 과정에 그대 “두엔데”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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