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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Nov 17. 2020

곡선의 시간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신의 선은 곡선이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말을 떠올리며 곡선의 시간을 바라본다.  한참을 앞을 보고 걸어왔는데 둘러보니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순간과 마주친다. 

11월 13일은 “노동자도 인간이다!”를 외치며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태일의 항거 50주년이 된 날이다. 나는 한국에서 자라며 고등학교 때 금서를 많이 읽었다. 네 살 터울인 큰오빠가 대학생이 된 후 오빠와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한 친구가 학생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수배자로 쫓기는 상황이 되었고, 그가 소지하고 있던 책들을 우리 집에 갖다 놓았다. 그때 항일운동가 김 산의 전기를 쓴 님 웨일즈의 <아리랑>, 전태일의 전기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 등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닭장과 같은 공장, 어두침침하고 환기도 되지 않아 결핵이 만연한 작업장에서 하루 16~18시간을 일하고 일급으로 커피 한 잔 정도를 받던 노동자의 삶의 모습은 두고두고 내 뇌리에 남았다. 

나는 최근에 존 스타인벡이 쓴 <분노의 포도>를 다시 읽었다. 선거를 앞두고 극심히 양분화된 미국의 현 사회가 1930년대 그가 그렸던 미국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했다. 올해 7월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먹을 것이 없어 종종 굶는다고 답한 미국 성인이 2년 전보다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워싱턴 D.C.와 38개 주에서는 어린 자녀가 있는 성인 열 명 중 한 명 이상이 음식이 부족하다 한다. 올해의 이러한 증가는 부분적으로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나 그 탓만은 아니다. 팬데믹이 있기 전부터 최근 몇 년 동안 노숙자가 크게 증가해왔다. 2019년에는 전년 대비 노숙자 수가 3% 증가하여 삼 년 연속 전국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차 안에서 숙식을 하는 노숙자들을 따라다니며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들 중 많은 이가 일을 한다. 심지어 투잡을 뛰어도 렌트비를 낼 수가 없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구호소나 피자집에서 디스플레이로 종일 내놓았던 피자를 받아 식사한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으로 은행에 집과 땅을 뺏기고,  농경지에 트랙터가 도입되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미 중부에서 캘리포니아 농장의 일자리를 찾아 노숙하며 이주했다. 과일을 수확하는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모여 비스킷 한 조각 얻을 만한 임금을 받으며 온종일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고된 노동을 하고도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던 그들과 2020년 노숙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다. 

제조업이 해외로 이주하거나 자동화된 후 제조업에 종사하던 많은 이들이 서비스업으로 옮겨왔지만, 제한된 일자리에 비해 너무 많은 인력은 최저 생활비도 충당할 수 없는 최저 임금, 부당한 노동 조건으로 일할 것을 강요받는다. 특히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경우 팁을 받는 근로자로 분류되어 연방 근로법에 고용주가 지급해야 하는 최저 임금이 시간당 $2.13달러에 불과하다. 맥도널드와 같은 큰 기업이 움직이는 전국 음식점 협회 (National Restaurant Association)가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근로자에게 병가와 같은 혜택을 주지 않도록 로비를 벌여왔기 때문이다.

“2019년 맥도널드는 CEO에게 평균 근로자의 거의 2천 배를 지불했으며 경영진 보상은 1천8백만 달러를 초과했다." 2020년 4월 비즈니스 잡지에 실린 한 기사의 제목이다. 지난 40년간 일반 근로자의 임금 상승은 12%에 불과한 것에 비해 CEO의 보수는 900% 이상 증가했다. 미국의 부의 집중도가 대공황 직전 1920년대 수준에 이르렀고, 2020년 팬데믹 한가운데 억만장자의 부는 신기록을 내고 있다.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는 낙수(Trickle-down) 경제학을 외치며 부자가 부유해지면 사회의 부가 늘어나고, 부의 집중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유리잔이 가득 차면 넘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이 이론은 허상이다. 유리잔이 넘치려고 하면 돈에 거식증이 걸린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밀쳐내고 더 큰 유리잔을 가져다 놓는다. 이러한 부의 집중은 <분노의 포도>에 묘사된 것처럼 사람들을 삶의 터전에서 밀어내고 그들의 삶을 황폐화시킨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자동화와 부의 집중이 가속화되는 현재가 1930년대 악몽 같은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노동자도 사람”이라 외친 절규가 이 땅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곡선의 시간을 주시한다. 생명을 낳는 황금 나선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2020.11.14. 미주 한국일보 주말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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