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 하면 집안의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아주아주 필요한 물건 몇 가지만 남기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나는 그 사람들의 정리된 집을 보는 게 너무 즐거웠다. 꽤 오래전부터 나는 정리하고 버리는 거에 집중했었다. 그러는 중에 이사까지 했으니 정말 많은 짐을 줄이기도 했다. 신박한 정리라는 티브이 프로를 보다가 어느 집의 정리된 거실을 짠 보여주는 장면에서 딸과 내가 동시에 "우리 집이네~"했던 적도 있다. 이사온지 일 년이 넘어가니 서랍 속이나 팬트리 찬장 안쪽으로는 다시 물건이 쌓이고 있어 맘이 무거워지고 있다.
미니멀리스트들이 쓴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해서 자주 읽는 편인데 얼마 전 읽은 책의 저자는 너무나 세세하고 꼼꼼하게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이유,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한 처절한 노력들에 대해 전혀 단순하지 않게 적고 있었고 나는 그걸 읽으면서 이 사람의 의식의 흐름이 너무나 나랑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순간 똭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원래 단순한 사람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많고, 단순하게 선택하지 못하고 이유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이구나. 그들은 그게 힘들어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어 하나 보다.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는 집에 물건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생활이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집에 물건은 한 개도 없는데 앉아서 이걸 할까 말까를 수백 번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다. 반대로 집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어도 사는 게 단순 명쾌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미니멀리스트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사람들이 짐 정리를 하고 물건을 없애는 이유는 그들은 집에 물건이 차 있으면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위가 3개인 사람은 가위를 쓸 때마다 3가지 가위 중에 적합한 가위를 골라야 하는데 단순한 사람은 집히는 대로 사용할 테지만 단순하지 못한 사람들은 적당한 것을 골라야 하고 또 그걸로 고른 이유를 누가 들어도 납득할 수 있게 준비해 둬야 한다고 느낀다. 누가 물어보면 논리적으로 대답해줘야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나포함) 진심으로 단순해지고 싶다면 아무 때나 써도 만족할 만한 딱 한 개의 가위만을 소유하고 싶어 지는 거다. 그게 그들이 물건의 개수를 줄이고 카테고리를 단순화시키는데 집착하는 진짜 이유다. 미니멀리스트의 집을 사진으로 보면서 느끼는 쾌감은 실은 그 모습이 내 머릿속 모습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전혀 미니멀하지 않은 나의 의식의 흐름은 대충 이렇다.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다고 느낀다.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라면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적당한 먹을거리를 골라 먹으면 되는 일일 거다. 그런데 나는 일단 앉은 채로 부엌에 뭐가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애들도 곧 배가 고플 것 같다. 그럼 애들도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적당한 메뉴가 떠오르면 그걸 내가 지금 준비하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한다. 이 시간에 애들과 함께 이 요리를 먹는 게 앞 뒤에 먹었거나 먹게 될 식사와 조화로운 게 정말 맞는지 가늠해본다. 그리고 결국 적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면 필요한 재료가 준비돼 있는지 생각해보는데 예를 들어 두부가 꼭 필요하다. 그래서 일단 슈퍼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그럼 슈퍼에 갈 때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생각한다. 뭣보다 한 번에 쭉 입고 벗기 편한 옷을 궁리한다. 그다음 나가려고 보니 기왕 나가는 김에 재활용이나 음식물쓰레기를 가지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음식물쓰레기봉투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냉장고에 식빵 먹다 남은 거를 같이 버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냉장고를 열었는데 식빵 말고도 남은 반찬 몇 가지를 더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걸 다 버리기에는 쓰레기봉투가 작고 다시 새것을 꺼내서 담아 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냉장고에 있는 게 냄새가 덜 날 것 같다. 게다가 저녁 먹고 남편과 같이 운동 나갈 때 음식물쓰레기를 버려도 될 것 같다. 그럼 나가지 말까? 두부 들어간 요리도 다음에 할까? 배고픈 거도 좀 참고 애들이 조르면 뭐라도 시켜줄까?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먹으면 되는 거였는데 결국 나는 책을 읽던 그 모습 그대로 쫄쫄 굶고 있다가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게 대체 뭐가 어렵다고?!! 만약 나한테 애들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남은 음식물도 없고 남편도 없었다면, 즉각 먹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원망 같은 게 생긴다. 어처구니없지만 이게 사실적인 나의 의식의 흐름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이게 물건을 없애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물건을 없애도 애나 남편은 없앨 수 없으니 나는 결코 단순하게 살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도 갖고 있다.
여러 가지 고비를 넘기고 결국 옷을 입고 나왔다고 치자. 그런데 쓰레기도 잘 버렸고 두부도 골랐는데 돈을 안 가지고 나왔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집에 가게 되어 너무나 억울해진다. 그 많은 선택과 계획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나올 때 쓰레기, 재활용 챙기고 엘리베이터도 미리 불러놨다가 허겁지겁 나오다 보니 돈 갖고 나올 생각을 깜빡했을 수도 있으리라. 결국 나는 집에서 나갈 때마다 분명 뭔가를 잊고 나갈까 봐 불안해진다. 살면서 남편이 나갈 때 집에서 엘베를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다. 반면 나는 안 부르고 나간 적이 없다.(거실 홈패드에서 엘리베이터를 누를 수가 있다) 나는 내가 어디든 다시 가게 돼도, 요리를 다시 해도, 엘리베이터를 오래 기다려도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 미리 계획하고 겁먹고 걱정하는 게 신물이 난다.
남편이 재활용하러 나갈 때 나는 물건을 이케저케 잘 담아서 좀 과하게 남편 손에 쥐어주면서 한 번에 다녀오라고 하면 남편은 꼭 '싫어 두 번 왔다 갔다 할 거야' 하면서 절반을 떨구고 간다. 외출할 때 남편이 먼저 나가면 미리 나갔으니 엘베를 눌러놨겠지... 싶지만 내가 나오는걸 보고서야 버튼을 누른다. (그래서 화낸 적도 있다.ㅠ) 남편은 웬만큼 집이 어질러져 있어도 하나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할 일이 생각나면 바로 한다. 뭘 할 때 같이 하려고 미루지 않는다. 필요한 건 바로 사지만 필요한 게 별로 없다. 살 때도 많이 고르지 않고 좀 더 비싸더라도 눈앞에 있는 걸 산다. 쿠폰이나 회원 할인 같은 걸 받거나 이벤트 응모를 하는 걸 본 적도 없다. 혹시 뭔가를 빠트리고 와도 아주 피곤한 경우만 아니라면 다시 다녀와도 상관없다고 한다. 옷도 적어서 뭘 입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잘 버리고 정리를 해놓아서 그런 게 아니고 잘 안 사서 그렇다. 이런저런 옷을 사자고 하면 열 번 중 아홉 번은 거절한다. 하지만 와이셔츠 속옷 양말은 누구보다 많다. (그건 내가 자주 세탁을 미루기 때문에 그렇다ㅠ) 남편은 머릿속도 대부분 간단하다. 두 가지 이상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하고 뭔가에 꽂히면 한동안은 그 소리만 한다. 옆에서 듣는 나는 지겹지만 본인은 엄청 열정적이고 들뜨고 행복해한다. 나는 자주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욱신거리는데 남편은 평생 머리 아프다는 적이 없다.
난 분명 미니멀리스트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남편에 대해 쓰고 있다. 언젠가 내가 아는 사람이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하니 돈을 하나도 안 주겠다고 했대서 남편에게 그 얘길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열 받아했더니 남편이 '자기는 걱정하지 마. 만약 우리가 이혼하면 나는 내 칫솔만 윗주머니에 꽂고 나갈 거야. 자기 다 가져' 하길래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남편이 그렇게 필요한 게 없는 간단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미니멀리스트를 동경한다면서 남편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종종 놀려먹었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남편의 그런 점을 배우려고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