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인문학' 연재를 시작하며

인식의 한계에 대하여

by 이진경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동시에 그 인식으로 인해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


외람되지만 아직 이런 말을 한 사람을 찾지 못한 관계로 평소 저의 생각을 다듬어 인용해보았습니다. 이 글은 부분과 부분, 혹은 부분과 전체에 관한 이야기, 혹은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인식에 관한 이야기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좀 두루뭉술하게 어떤 중첩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 화면을 켜는 순간, 내가 스마트폰 화면에 접속함으로 스스로 차단시켜버린, 그래서 결국은 영원히 놓쳐버린 그 아침의 여러 다른 순간들의 목록을 작성해보곤 합니다. 8시 32분에 연 창문틈으로 들이마시는 신선한 공기,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유난히 쾌청한 하늘, 연이어 몸을 한껏 늘리 듯 팔을 뻗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힐 때 생겨나는 연속된 동작들, 동쪽 편 상가골목 위에서 들이친 햇빛을 따라 올려다 본 오늘 아침의 얼굴 같은 태양 등등... 내친김에 목록은 조금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 태양빛은 정확히 8분 20초 전에 태양 표면으로부터 출발해서 지구에 도착한 빛을 담고 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내일의 태앙은커녕 지금 이 순간의 태양조차 절대로 볼 수 없으니(현재의 태양은 8분 20초 후에야 볼 수 있으므로) 늘 과거의 태양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새삼스런 자각 같은 것, 또는 '왜 인간세계에선 순간들의 중첩이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이런저런 부질없는 상념들 말입니다. 하다 말다 하는 이 하찮은 목록 적기는 가끔은 의식이 두 곳에 동시에 집중할 수 없어 놓쳐버린 다른 쪽 과거 순간들을 아주 잠깐이나마 중첩시켜보는, 저만의 상상 놀음에 빠지게 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부질없는 시간 낭비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넓기도 넓은 뿐 아니라 겹겹의 구조 안에 감춰진 부분도 많은 매우 복잡한 곳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내가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해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심지어 그 한계는 매우 크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쉽고 명백한 근거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이상적인 관찰자 위치인

' 아르키메데스 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세상과 분리되어서 홀로 설 수 있는 세상 바깥의 자리는 없습니다. 컴퓨터 안에 있는 부품 하나가 컴퓨터 전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와 같은 일입니다.


둘째, 우리는 세상 만물의 대부분을 빛(전자기파)을 매개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전자기파는 어이없게도 전체의 고작 2.5%밖에 되지 않습니다(정확히는 지구의 생명체가 이 정도의 파장만을 감당하도록 적응한 탓이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전부는 사실상 실재로부터 얻어낸 지극히 제한된 일부의 정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만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충분하다는 게 놀라울 지경입니다.


셋째, 그나마도 우리의 뇌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상의 실체가 무엇이냐보다는 유용성을 우선으로 따져 적극적으로 '착각'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뇌는 스스로를 속이기도 합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이지요. 그렇지만 뇌는 그 외에도 자기가 할 일을 분명히 알아서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작동하는 놀라운 기관입니다. 세계(대상)을 인식하고(정보를 받아들이고), 인지하고(그 정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해석하고), 거기다가 놀랍게도 자기가 인지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 스스로 알고 사고하는 일(메타인지)까지 해냅니다. 인간의 신체중 중요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지만 뇌는 정말이지 보통 귀한 게 아닙니다. 만,


여러 근본적 제약 하에서 인간은 언제나 일부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과학하는 인문학' 은 진정한 이해란 그러한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나보다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가 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일부'를 조금이라도 확장하여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일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 과학하는 인문학은 좀더 다각적인 면에서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의 '렌즈'와 인문학적 '통찰'이라는 두 가지 시선으로 흥미로운 주제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 연결하고, 상호작용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어쩌면, 뭐랄까, '사랑이 싹트는 것'과 유사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아르키메데스 점: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가설적 기준점, 즉 연구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을 유지하면서 대상과 그밖의 다른 것들의 관계를 관찰할 수 있다는 이상적 관찰자 위치를 뜻한다. 아르키메데스가 했던 “(지구 바깥의) 움직이지 않는 한 점만 주면 지구를 들어 올리겠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위키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