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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아 Aug 28. 2017

#13.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글쓰기>에 대하여.


'글을 좀 써봐야겠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평일 아침 7시 정각이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회사 통근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의 물기도 말리지도 않은 채 정거장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던 길이었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 길 - 교복입은 고등학생 등교길 손에 쥐어진 빽빽히 필기된 공책이 눈에 얼핏 들어왔다. 10월이니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구나. 그렇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직장인]의 신분이 되자마자 희미하게 잊혀져버린, 중고등학교 시험기간의 힘겨웠던 기억이 뇌리 속에 달리기 속도만큼 스쳐지나간다. 당시 내 나이 스물아홉살 - 내 인생에 과연 중고등학교 시험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법한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에서 자라온 나에게 그 당시 치뤄냈던 수많은 평가제도와 교육시간들은 과연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 시간들을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친구들에게 내 경험은 어떤 '참고용 예시답안'이 될 수 있을까? 내 인생 처음으로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이렇게나 뜬금없고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첫번째 글 [대한민국 학생들이여, 화이팅!]




글을 쓰다;


   글쓰기의 출발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글을 쓰기 시작한 처음에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야만 글쓰기가 가능한 것일줄 알았는데 막상 써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포착한 삶의 단면, 그 순간을 잡아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점이었다. 그 일상의 단면은 처음에는 빙산의 일각처럼 작고 사소해보이지만 그것이 나에게 반짝거리는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 그 이유를 파내려가다보면 결국 그 표면의 뿌리에는 자신이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관심사와 연결이 되기도 하고, 사회문화적 배경 또는 사회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잘 묶어서 글로 쓰면 되는 것이다. 평소 자신의 마음에 걸렸거나 혹은 표현하지 못해 답답함이 느껴졌던 삶의 작은 에피소드(Episode)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글쓰기의 시작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내적 호기심과 민감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또한 자신을 세우는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수 없는 시대, 진실된 말을 이야기하는 일이 버겁고 어려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제로 <표현>하는 행위 - 그 행위가 오늘날 우리 삶에 기여하는 가치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은유 작가님의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 모든 이들이 약자다'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이 소유한 언어로 즉, 말이나 글로써 그것을 표현하기 전까지는 모든 생각이나 개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표현되지 않은 모든 것들은 결국 표면화되지 않기에 문제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위 '예스맨(Yes-man)'이 사회생활의 기본 소양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우리 사회에,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손해라고 느껴지는 우리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은 우리 삶 속에 사이다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시원하게 쏟아내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정갈한 글 한편으로 풀어내보자. 가슴 한켠에 자리했던 답답함이 시원하게 뚤리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고 생각이 체계화되는 경험은 덤으로 느낄 수 있는 글쓰기의 기쁨이다.


사고(Thinking)하기 위한 글.


   우리는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생각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손가락 움직임 몇 번이면 10초내에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 매일 내 눈 앞으로 쏟아지는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생각하는 힘을 상실했다. 초등학교 '삐삐'시절, 10명이 넘는 가족과 친구들의 집전화를 줄줄이 외우고 있었던 그 시절이 내 인생 기억력의 최고점이었음을 기억한다. 오늘날 스마트폰의 훌륭한 번호저장 기능을 얻은 대신 나는 기억력을 제물로 바쳤다. 기술의 발전 형태와 속도에 따라 우리의 기억력은 그에 알맞게 발달하기도 하고 퇴화하기도 하는 뇌의 신비는, 오늘날 단편적이고 깊이없는 정보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패턴 속에서 그에 맞는 사고력 수준을 갖게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로 우리 뇌에 작용한다.

   깊이있게 생각하는 법이 크게 필요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글은 생각의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는 '웨이트 트레이너'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체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글과 관련된 개인적인 일화를 꺼집어내야 하기도 하고, 하나의 주제를 사회적/역사적/문화적 차원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글쓰기란 생각의 한계를 마주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주제/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해보고 자신만의 관점을 도출하는 일.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보를 역으로 찾아보고 파고드는 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일. 글쓰기에서 창작의 고통이란 결국 자신만의 오롯한 생각을 세워나가는 데에서 수반되는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원하는 수준만큼 발달하기 마련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찢어진 근육이 더욱 단단하게 되는 것처럼 조금씩 글 속에 자신만의 생각을 키워나가다보면 우리의 뇌는 어느새 다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되찾게 될테니 말이다. 평생 5%미만의 뇌의 영역을 사용하다 죽는 우리들에게 글을 통해 그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보는 건 어떨까?


타인과 세상을 향해 쓰는 글.


   앞서 이야기한 글쓰기가 '자신을 위한' 글쓰기였다면 좀더 고차원적인 글쓰기, 바로 <타인을 향해 쓰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내 생각을 독자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글.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아, 나도 이렇게 생각해!' 혹은 '아,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구나!' 라고 공감을 일으키거나 영감을 줄 수 있는 모든 글은 더 의미가 있다. 자신의 글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며 타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창을 내어주는 일. 답답했던 타인의 마음을 정돈된 한 편의 통쾌한 글로 시원하게 뚫어주는 일. 글을 쓰는 일이 더이상 나만의 활동이 아닌, 이 사회 속에 울림으로서 작용하게 되는 순간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많이 보고 있는데 문체가 화려하진 않지만 작가의 생각이 촘촘하고 다양해서 투박하지만 내용이 힘있게 전달되는 글, 그런 글이 매력있고 더 호소력있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그렇게보면 글은 생각(Concept)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지 텍스트(Text)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 글재주가 없다고 생각해서 글 쓰기를 주저했던 분들이라면 이런 마음으로 글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글은 그것에 담기는 생각(Idea)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특히 이 시대에 글을 통한 타인과의 연결성이 더욱 중요시되는 이유는, 오늘날 텍스트의 형태가 디지털화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연결만으로 디지털 텍스트 컨텐츠를 언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는 이 무한한 텍스트의 확장성은 오늘날 개인의 글쓰기가 더이상 나만의 활동으로 국한지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글을 매개체로 하여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공감을 얻는 세상, 자신의 글을 어떠한 비용 없이 수천명의 사람들이 전달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개인 글쓰기 행위에 엄청난 힘을 부여했다. 1인 미디어 시대 - 타인과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접점이 자신의 이야기, 글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 쓴 글 조회수가 갑자기 급상승해서 보니 다음 포탈사이트에 게시되어 있었다. 디지털컨텐츠의 확장용이성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게한 계기였다.




글쓰기의 치명적인 매력.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계층이나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글을 쓰는 언어(Language)체계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전혀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 하나의 언어를 쓸 수 있는 모든 이들은 글을 쓸 수 있다. 지금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고 펜을 드는 이들은 모두 작가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을 창작활동이자 예술적 행위라고 이해한다면, 글쓰기 보다 더 돈이 들지 않고 손쉽게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을까? 글쓰기의 매력은 높은 접근성에도 존재한다. 창작활동에 필요한 작업실도, 악기나 팔레트/물감도 전혀 필요없다. 내 몸뚱아리를 앉힐 수 있는 테이블, 펜과 공책, 이 시대에는 핸드폰만 있으면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반복되는 업무와 무료한 일상 속에 창의적인 요소가 필요하다면 이번주 주말부터 글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개인적으로 주말 오전에 조용한 집 근처 까페에서 맛있는 커피 한잔으로 써내려가는 글쓰기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 시간만큼은 나를 예술가/작가로 변모시켜주는 가장 창의적인 시간이자, 나만의 언어로 나를 채워내는 시간이 된다. '글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다(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는 명언으로 시작되는 브런치(Brunch) 앱을 다운받아서 시작해보는 것도 나름 괜찮다.


나된 글.


   개인적으로 글을 쓰면 쓸수록 느끼는 점이, 글 속에서 내 자신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 사실이 조금 무섭기도 하다. 글을 쓰려고 선택하게 되는 주제부터 내 가치관과 관심사를 담아낼 수 밖에 없고 내가 하는 생각들을 전부 여과없이 드러내야 하기에, 그 생각들은 모두 내 삶을 기반하여 나오기 때문에 그러하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제3자에게, 이 세상에 나를 온전히 드러내는 행위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작업임을 새삼 깨닫는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글을 통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이세라'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이유도 <글을 쓰지 않는 나>와 <글을 쓰는 나>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서, 두개의 나 사이에 괴리가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나 밖엔 쓸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글'이라는 점 때문에 글쓰기가 흥미롭기도 하다. '이세라'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글, 내 삶의 발자취를 걸어오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유일무이한 글이라는 점만으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처음부터 읽어봄직한 가치를 갖는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동안은 '화려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최신 트랜드에 맞는 주제로, 더 화려한 문체로 내가 가진 지식을 담아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남들에게 주목받는 글 - 하지만 그것에는 결국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글은 내가 아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나오는 것이기에, 나의 마음을 깊이 울리기에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글만이 가장 수월하게 잘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내가 아닌 글, 나를 뛰어넘은 글은 나올 수 없다는 점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지금은 <나 다운 글,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기위해 노력 중이다. 결국 글은 나를 담아내는 텍스트 형태의 초상화가 아닐까? 만약 내가 죽으면 초상화 대신 가장 잘 쓴 글을 한편 내 영정사진으로 걸어두고 싶다. 내 삶의 모습이 온전히 담겨있는 글, 그래서 나라는 사람을, 내 인생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글 말이다.  


글이라는 집을 짓는 일.


   마지막으로 글쓰기의 매력은 구조학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글도 건물을 올리듯 설계과정이 필요하기에 작가는 <글을 짓는 건축가>가 된다. 신기하게도 건물과 글은 같은 동사 '짓다'를 사용한다.

   매번 주제는 다를지언정 내가 글을 쓰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먼저 일상의 작은 단면을 포착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나간다. 한 편의 글을 쓸 정도의 풍부한 지식이나 생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관련된 책과 여러 컨텐츠를 읽어보면서 쓸 거리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만들어나간다. 이렇게 글의 재료들이 충분히 준비되면 자신의 관점/생각이 생기게 되고 이 때부터는 '글을 설계'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어떤 이야기를 사용해서 글을 시작할 지에서부터 각 문단별 중심생각으로 전체적인 글의 골격을 짠다. 가끔 번뜩하고 생각나는 재미있는 단어나 표현들은 따로 적어두었다가 문맥에 맞춰 적절히 배열하기도 한다. 글의 재료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차원과 느낌과 글이 나올 수 있기에 글쓰기에서 구조화 작업은 재밌기도, 가장 핵심적인 과정이다.

   글의 구조화 작업이 끝나면 각 문단별 중심생각/이야기로 좀더 디테일하게 살을 채워나간다. 철근으로 집의 골격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콘크리트로 면을 만들고 집의 모양새를 만들어나가는 과정과 같다. 벽지를 바르고 인테리어로 장식을 하는 과정은 문장을 하나씩 섬세하게 다듬어나가는 일일 것이다. 어떤 단어를 쓰는지, 어떤 미사여구나 의성어를 선택해서 사용하는지, 어떻게 문장을 마감하는지, 어떤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지에 따라 표현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나는 이를 표현의 극(Drama)적인 요소라고 표현하고 싶다. 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구조/문장/단어를 사용하여 글을 <설계>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순간 - 이 극적인 순간의 떨림은 글의 마지막단락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존재한다. 

   특별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이 브런치 앱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모바일에서 보기 때문에 마지막 퇴고를 핸드폰에서 하고있다. 모바일의 경우 이동성(Mobility)을 갖는 디바이스이기 때문에 글의 길이가 너무 길지 않고 읽는 호흡이 빠른 편의 글을 독자들이 선호한다. 사실 내 글은 다양한 생각의 흐름을 충분히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어서 글 분량이 길다. 그래서 모바일 독자들의 구미(?)에 맞게 작성된 글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 자신도 인정한다. 하지만 문장이나 문단의 호흡이 너무 길거나 휴대폰 스크린상으로 보기 안 좋은 부분은 최대한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글쓰기라는 도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변 지인들이 나에게 묻기 시작했던 질문 '글을 왜 쓰느냐?' 혹은 '글을 어떻게 쓰느냐?' 에 대한 답변들을 이렇게 쓰고 있지만 글쓰기는 사실 나에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쓰고 싶은 이야기거리가 생길 때만 글을 쓰는 매우 '라이트한 수준의 작가'이지만 더이상 쓰고 싶은 주제가 없어 글을 못 쓸까봐, 생각의 밑천이 드러나 더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올까봐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결국 내가 아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쓸 수 있는 것이 글이기에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최근 내가 미친듯이 책을 읽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기도 하지만) 가끔은 쓰고 싶은 주제나 생각의 흐름이 나의 과거, 상처와도 맞물려있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솔직하게 써내려갈 용기가 없어 주저하는 내 모습 또한 마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자신의 삶을 굳건히 떠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글을 쓰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침묵을, 때로는 '예스(Yes)'만을 외치길 강요하는 이 시대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가지길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를 권하고 싶다. 과자와 같이 간편하고 입맛 좋은 정보만을 소비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망치로 깨어야만 그 알맹이를 얻을 수 있는 호두와 같은 생각의 수고로움으로 써내려가는 글을 쓰길 응원하고 싶다. 그래서 자신을 위한 글쓰기에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의 창이 될 수 있는 글, 타인과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는 글들이 많이 탄생하길 기대해본다.

   

To be continued.

(글쓰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사실 요즘 나의 고민은 글을 쓰는 행위를 자본주의 개념과 결합을 할 것이냐, 아니면 내 삶에 고유한 예술적영역으로 둘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김칫국을 아주 맛있게 '후루룩'하고 먹는 소리겠지만 솔직하게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면서 사는 삶>을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글을 쓰는 일은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나이지만 글을 쓰며 '먹고 산다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머뭇거려지는 마음을 감출 순 없다. 그 길에 남다른 의지와 뜻이 있지 않고서는 쉬운 길이 아니기에. 인문학이 우리 사회에 가치가 있는 것은 쓸데가 없기 때문에, 즉 모든 것을 효용(Utility)의 개념으로 전환하여 이해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히 저항하기 때문이라는 이 불어불문학 인문학도의 쓸데없는 신념처럼 글 쓰기가 효용의 개념으로 전환되었을 때 예견되는 낙심함과 실망감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허리가 아파본 사람은 안다. 그 통증이 어떠한지, 그 아픔이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떤 크고 작은 심정변화가 하루에도 수십번 마음 속에 일어날 수 있는지.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아도 '아악' 소리만으로 아파본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자리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감대는 직접 아파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알고 전인격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경험의 범위가 넓어 타인의 삶과 마음을 내 것처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글. 혼자 내는 목소리가 아닌, 메아리처럼 울려서 사람과 사회로부터 돌아오는 글. 사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는 글, 읽으면서 눈물 한방울 정도는 비싸지 않게 흘릴 수 있는 글, '유레카!'를 외칠만큼은 아니지만 소박하게나마 일상에 신선한 발견이 존재하는 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나의 마음 속에 울리는 한가지 소리 - 글쓰기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쓰고 싶다는 것이다. 어쨌든 글쓰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쭈욱.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도 글쓰기라는 작은 씨앗 한톨이 심어지기를, 그 씨앗이 당신의 삶을 풍성하게 변화시키는 열매가 되길 응원해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어느 토요일 집 근처 까페에서.



* 작가의 생각과 글에 대한 무단 도용은 저작권 위법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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