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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Mar 10. 2024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학교에서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온라인 강의였는지 몰랐던 강의가 온라인이란 걸 알게 된 나는 줌 강의실에 들어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학교 와이파이는 너무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기 벅찼는지 자꾸만 나를 튕겨내고 있었다. 그러기를 40분째였다. 울려대는 전화 소리에 응답할 여유가 없었다. 끊기 버튼을 누르고 이러다 첫 수업을 통으로 날리는 거 아닌가 하는 망연한 마음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도 없는 나는 믿을 구석이 오롯이 나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 20분 전에 휴대폰 핫스팟과 연결된 노트북은 그제야 줌 창을 내게 띄워주었고, 나는 이거라도 들은 게 어디냐고 생각하며 집착을 탈탈 털어내려 했다. 노트북 뚜껑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마지막 남은 일말의 미련까지 폴폴 날리는 먼지와 함께 날려버렸다. 집으로 가는 대신 청량리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오늘은 동생과 엄마 생일선물을 사기로 한 날이었다. 엄마의 생일은 3월. 가족 중 가장 먼저 있는 생일이라 그런지 매년 엄마 생일선물은 빼먹지 않고 챙겼다. 올해에는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몇 주 전 엄마집에 갔을 때 예전에 생일선물로 준 향수를 다 쓴 게 보였다. 미스 디올 블루밍 부케. 용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저거 몇 번 뿌릴까 싶은 쪼끄만 것도 1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평소라면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해 쳐다보지도 않는 그 연분홍색 액체와 비슷한 걸 찾아보기로 했다. 동생이 좀 늦는다는 카톡을 보냈다. 백화점으로 걸어가는데 우박 같은 비가 내렸다. 요상한 날씨에 하늘을 바라보며 “이게 비야 눈이야?” 중얼거렸는데 뒤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똑같이 “이게 비야 눈이야?”라고 하셨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백화점 1층으로 들어갔다.


  일찍 도착해 할 일도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백화점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백화점 1층 한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베이커리 카페를 보기 전까지는. 명품 화장품과 향수가 가득한 백화점 1층에 베이커리 카페라니. 이런 조합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아주 반짝이는 것에 이끌리듯이 카페로 걸어갔다. 청양고추와 참치가 들어갔다는 빵, 옥수수빵, 소세지빵, 각종 휘낭시에들이 나의 위장과 1:1 대화타임을 요청하고 있었다. 배고프지? 오늘 점심도 못 먹었잖아. 응, 응!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청양고추와 참치가 들어간 빵을 집어들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동생이었다. 지금 어디냐고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만나기로 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도 에스컬레이터 앞에 있다고 답했다. 


    안 보이는데?

    니가 반대쪽에 있어서 그런거 아니야?

    아~ 그럼 내가 글로 갈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금슬금 에스컬레이터 앞에 가서 섰다. 갑자기 내린 우박에 대해 얘기하며 나는 자연스레 베이커리 카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 베이커리 카페가 있네! 빵 맛있겠다 먹고 갈래? 동생은 배부르다고 했다. 나 혼자 아까 찜해둔 청양고추 참치빵을 먹으며 어떤 향수 브랜드가 좋을지 얘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동생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아! 하고 말문을 열었다. “아까 왜 전화했나면.” “아 맞다. 까먹고 있었네.” “엄마가 이번주에 창원 오지 말래.” 그 순간 나의 얼굴은 볼 만했을 것이다. 땡그래진 눈과 살짝 벌어진 입,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는 입꼬리… 길 잃은 강아지가 귀를 축 늘어뜨리고 쏟아지는 우박 밑에 서 있는 것 같은 처량함. 창원은 엄마 집이 있는 곳. 다음 주가 엄마 생일이라 오늘 생일선물을 산 후 내일 수업이 끝나는 대로 창원에 가 다 같이 축하파티를 할 예정이었다. 3주 만에 엄마를 만나는 건 개강 1주차의 피로를 날려버릴 이번 주의 기대되는 이벤트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은 그런 나의 표정을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엄마가 언니야가 실망할 거니까 나보고 잘 말하래. 그래서 내가 알겠다고 했지.” 동생은 반려동물에게 더 이상 간식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충격. 그러니까 두 사람은 나의 반응을 손바닥 위 손금 읽듯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거다. 


  메마른 시금치처럼 시무룩해진 나는 입을 꾹 닫고 포크로 빵의 구석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동생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언니야는 항상 엄마랑 싸우면서 엄마 보러 가는 걸 좋아하더라.” 그랬다. 엄마는 나와 비슷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고, 비슷한 면에 속아 즐겁게 대화를 하다 보면 너무나 다른 면이 가시처럼 파고들어와 대화를 끝장내곤 했다. 우리의 대화 끝엔 꼭 우는 사람이 있었다. 주로 나였지만, 가끔은 엄마였다. 그래서 애증의 관계고 그래서 피하고 싶을 법도 한데 나는 ‘엄마’라는 단어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 성격이 싫은 적도 있었다. 안 좋은 경험을 하더라도 거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족한 학습능력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매일매일 똑같은 구렁텅이 속에 똑같은 방식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태어나는 거 아닐까. 어제 어떤 힘든 일로 마음이 구겨졌든 다음 날이면 깨끗이 다린 새로운 마음이 도착한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 느끼는 시기에도 새롭게 사랑할 마음은 있었는지도 몰랐다. 텅 비었다고, 부스러기만 남았다고 생각한 나의 낡은 마음이 낯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쉽게 믿기 힘들지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믿고 싶은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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