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이고 싶은지

정혜윤 - <책을 덮고 삶을 열다>

by 지인

책을 다 읽자마자 이 책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마음속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느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세상이 새로운 시선으로 보이는 느낌을 경험했다. 그동안 나의 편협했던 시각을 돌아보게 만들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 매 문장마다 생각하게 만든다. 정혜윤 작가님의 <책을 덮고 삶을 열다>를 읽으며 느낀 것들이다.


정혜윤 작가님의 전작인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삶의 발명>을 좋아했던 독자로서 신작이 나온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들려주고 싶은 좋은 이야기들이 더 있을까?' 좋은 이야기의 양은 한정되어있다고 나도 모르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좋은 이야기보다는 슬픈 이야기, 힘든 이야기가 더 많은 곳이라고. 그래서 이제 작가님이 할 이야기가 없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와 개인적인 비관이 섞인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은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슬픈 와중에도 아름답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슬픔은 슬픔만이 아니야. 어떤 것이 너를 살게 만들어?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외로운 사람들이 내어주는 용기와 사랑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나 자신에게로만 향하는 집중에서 벗어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아름다운 책을 읽다 보면 일상을 살아가면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던 나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방 하나를 방문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간간이 방문한 턱에 바닥엔 먼지가 뿌옇게 앉아있는 나의 작은 방. 아주 오랜만에 그곳의 두꺼운 철문을 여는 열쇠를 돌린 듯한 기분이다. 그러고나면 보이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쌓아둔 것들과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마음들. 휑한 것들과 빛나는 것들이 섞여 있는 나의 방에서 오랜만에 눈을 뜬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분명히 보인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마음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이 있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는 생명체들. 바다 냄새와 육지 냄새를 다 담은 바람들. 작은 것들의 큰 의미. 세상의 온갖 신비와 경이로움. 이런 것들이 하찮거나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p.67)


세상은 아름다움보다는 온갖 안 좋은 것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혐오, 폭력, 생각 없이 내뱉는 말,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기후위기, 그런데도 바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 동물학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무의미하다고,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말하기에 나는 아름다운 것을 많이 알고 있기도 하다.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별, 오로라, 바람, 초록 들판, 지저귀는 새, 아름다운 책, 반딧불이, 새해 일출, 사랑, 용기, 나눔,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위해 하는 몸짓. 정말 작은 일상의 순간들.


책에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울프는 삶의 의미는 엄청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그러나 강렬하고 빛나는, 어쩌면 충격과도 같은 '존재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등대로>에서 화가 릴리는 이렇게 말한다. - 내가 원하는 건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건 의자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p.87-88)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일상의 순간을 축복처럼 받아들이는 건 망각의 늪과 권태로움에 빠지기 쉬운 인간에게는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떠오르는 기억들. 죽기 전에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갈 것 같은 기억들. 그런 순간들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런 순간들이 오면 잘 알아볼 수 있게 잘 닦여진 안경을 준비해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의미가 뭘까? 의미가 있기는 한걸까? 인간은 그저 많은 생명체들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생명체의 순환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인생은 경이로운 것들로 이루어져있고 그러한 것들을 알아챌 때 삶이 살 만해진다.'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결국에는 '두 번은 없는' 삶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우리 인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p.111)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야기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늘 놀랍고 신기한데,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이제껏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눈이 생긴 것만 같다. 세상을 저렇게 바라볼 수도 있구나. 저런 문장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너무 닮고 싶은 말은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책에서는 이렇게 삶의 여러 변화를 선택하는 것을 '책 읽기'와도 연관시켜 말하는데, "책을 읽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뭔가가 바뀐다"고 한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관계 맺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책 읽기는 스스로에게 (다르게 변화할) '기회 주기'이자 '씨앗 뿌리기'가 된다(p.176).


책과 삶이 하나의 덩굴처럼 얽혀 있다는 점이 좋다. 특히 책 읽기는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한 '씨앗 뿌리기'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는데, 그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을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선물같다. 나에게 좋은 선물을 많이 주고 싶다. 내가 변화하는 것이 나 혼자만 변화하는 일이 아님을 자주 떠올리고 싶다. 나를 잊고 새로운 세상에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느끼고 싶다.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며 나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접은 책의 페이지마다 나를 조금 더 삶의 아름다움을 믿는 쪽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는 쪽으로 이끌었다. 80년 산다고 쳤을 때 인생의 1/3 가량이 지나가고 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며 살고 싶은가. 어떤 빛을 따라가야 할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이 책을 펼칠 것 같다. 어느 페이지든 내게 해줄 말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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