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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Mar 29. 2021

공방전

직업의 턴어라운드

물레를 돌리며      

           

  도자기는 내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좋아하게 된 것은 22년 전 도서관 ‘예술 500번대’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도자기 책들을 발견하고선 눈을 못 떼고 한참을 서서 가슴 설레며 책에 있는 사진들을 보았다. 책도 도자기처럼 무거웠다.

  물레 전공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물레 앞에 앉은 날이었다. 흙 하고 씨름을 하느라 팔과 다리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작은 흙덩어리의 힘이 보통 아니었다. 흙이 말을 듣지를 않아 진땀을 뺐다. 내 힘으로 쉽게 이겨 먹으려 할수록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흙이 참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 

 반죽한 흙을 물레 위에 붙이기 위해 찰싹찰싹 손바닥으로 내려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 오르골의 발레리나인데 힘은 천하장사다. 이번엔 좀 순조롭게 가자고 부탁하듯 살살 돌려가며 마음을 제어한다. 순식간에 스르륵 길게 나오는 명동의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를 상상한다. TV에서 본 물레 돌리는 모습은 힘 하나 안 들이고 손끝으로 부드럽게 자유자재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재밌어 보였다. 자연의 재료들을 누르고, 치고, 깨고, 다듬고, 붙이는 기쁨으로 근육이 꿈틀거렸다. 낡은 연장은 빛나 보였다. 


 난 한동안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신 이두박근이 생기고 튼실한 팔뚝을 갖게 되었다. 힘이 들어 물레 앞에 놓인 흙탕물이 된 물바가지를 넋 놓고 바라본다. 물아래 진흙이 가라앉은 모습이 나의 행복한 슬픔과 우울한 기쁨이 섞인 꼴 같았다. 노력으로 꿈을 이루겠다고 힘을 잔뜩 주다 중심을 잃고 헤매던 날들이 겹쳐 보인다.      

  원하는 모양의 그릇을 만들려면 먼저 물레 위에서 돌아가는 흙의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 과정은 가장 기본인데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린다. 엉덩이 골반의 힘을 주축으로 팔과 허벅지의 힘으로 버틴다. 물레의 속도에 맞춰 힘을 조절해나간다. 물레 연습은 엉덩이 힘이다. 뚝심이다. 잘 안된다고 에잇 마음을 푸는 순간 흙은 더욱 꼬인다. 흙은 배짱도 있고 배알도 있다. 

쓸모 있는 그릇을 빚는 것은 그다음 단계다. 이제부터는 원심력을 이용한 추진력이다. 흙의 입자들이 꼬이고 엉킨 것을 풀어 중심이 잡혀야만 용도와 디자인이 내 마음대로 가능하다. 내가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에 따라 물레가 돌아가는 방향이 달라지고, 누구한테 어떻게 배우느냐에 따라 기술과 스타일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번은 심통이 나서 흙 모가지를 붙잡고 부러뜨리고 말았다. 흙을 상대로 싸웠다. 힘을 너무 주었더니 흙은 물레에서 떨어져 저 멀리 휙 날아 가버리기도 했다. 발레리나도 가볍게 돌고 서는 것으로 보여도 사실은 중력을 거스르며 발끝의 고통을 견디지 않던가. 

내가 힘을 다 뺄 때까지 흙이 기다렸다는 듯이 얌전해진다. 흙도 내게 몸을 맡겼다. 입구가 오므라진 호리병, 활짝 핀 나팔꽃 같은 접시, 국그릇으로 사용할 형태로 라운드넥 모양으로 시원하게 벌린다. 시간을 들여 노력해서 버티니 자유로워졌다. 항공사 근무 시절도 그랬다. 120개 인종이 모여있는 외국 항공사에서 제대로 견뎌냈다. 프로다운 훈련을 받고, 팀워크로 일하며 군대 같은 훈련을 마쳤다. 나에게도 배짱이 생기고 뚝심이 생길수록 근육도 생겨났다.     


물레 성형 사진


 불의 예술에는 실험에서 얻어진 철저한 기본 이론을 바탕으로 숙련된 기술이 필수였다. 불에 한 번 들어가면 그다음부터는 사람 손을 떠난 운명적인 예술이었다. 결과물이 어찌 나올지는 가마에서 구워져 나올 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케세라세라 정신이다.

도자기는 850도의 초벌구이와 1250도의 재벌구이를 거쳐야 완성품으로 쓸모 있는 그릇이 된다. 피할 수 없는 불의 연단과 심판을 통해 인내의 과정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불에 흙이 10시간 동안 버텨서 비로소 흙이 유리질화가 된다.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보다 더 멋진 자연의 효과를 기대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제작 과정 중에 있었던 알게 모르게 한 작은 실수가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갈라지거나 깨져서 살아남기가 어려운 사정은 이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이 내 삶과 닮았다. 깨질까 조바심을 내고, 부족한 점을 메우고, 작은 결점에도 만족하지 않고 신경을 쓰느라 수만 번 다듬는다. 내가 마음을 쏟은 것은 소중하게 반복과 수정을 감내하며 즐겼다. 꿈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조금씩 수정하며 이뤄졌다. 

난 전공과 다른 일을 했었다.  비행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외국 도자기 책들을 사서 모았다. 아마 작업을 안 하는 예술가라서 부러움을 책으로 대리 만족했다. 덕분에 외국 생활에서 남은 자산으로 예술 분야 서점을 열어야 할 만큼의 책과 자료가 쌓였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외국 도자 예술 관련 책을 사고 싶어도 파는 곳이 없었다. 도서관의 책들도 요즘 시대의 책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책들이었다. 그때는 그조차도 배울 게 많았다. 

 유럽을 다니면서 문화 예술의 끝없는 세계와 요즘의 유행과 스타일에 충격을 받았다. 이번엔 제대로 일하면서도, 국제적인 무대에서, 프로답게 회사 생활을 하며, 이후에 예술가가 되었을 때 필요한 자산이 될 거라 믿었다. 외국에서 내 도예 전공의 지경을 넓혀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다. 

유럽의 동서남북에서 수백 년간 이어온 예술부터 요즘의 현대 도자 예술을 보느라 세월이 가는지도 모르고 비행을 했다. 도자기에도 흙과 불의 만남으로 인해 이룰 수 있는 색상과 질감이 무궁무진하듯이. 비행과 예술이 만나니 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느꼈다. 


나의 작품 사진 - flowery mountain 화병 시리즈 1.



 이제는 한 단계 나아가 내가 경험하고 모은 수많은 콘텐츠를 어떤 그릇에 담아서 공유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을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면 흘려보낼 수 있을까? 세상의 문화와 예술을 축복으로 받은 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나만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싶어 콘텐츠를 꾸준히 넓혀가고 있다.      

 

 저녁이 되어 물레 앞에 앉았다. 하루키의 수필집을 잠시 펼쳤다. 내 지금 복장을 비유한 딱 맞는 표현을 보고 웃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티셔츠에 면바지가 세련되고 감각 있는 옷차림으로 묘사되었다. 하루키 역시 편한 옷차림에 단정한 머리가 유니폼이라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나. 

나 역시 잘빠진 유니폼이 아닌 흙 묻은 앞치마, 음식 냄새가 아닌 흙냄새가 난다. 언제 유니폼을 입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앞치마를 계속 매고 있던 것처럼 느껴진다. 매일 여행이 아닌 작품을 만들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다. 차분히 돌고 도는 물레 앞에 앉아 마음의 소리를 들어본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기 위해 귀와 어깨가 멀어지니 고요한 자세가 된다. 

손가락 관절이 전보다는 둔해진 느낌이다. 다부진 손끝의 내공으로 부드러운 손바닥 안에 들어있는 노하우를 펼치며 요즘 도자기 클래스를 하고 있다.


공방에서 원데이 클래스 하는 중입니다.


공방은 가끔 설레며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할 때 차분하게 자신으로 돌아오는 곳이다. 내게도 드디어 기대치 못한 일을 만드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내 삶은 지금 손과 도구로 흙을 다루고 형태를 다듬듯 작업 중이다. 세상이 부르면 언젠가 또 나가야 하니까. 비행 항로를 닮은 자글자글한 손금을 인생 지도 삼아서.

삶이 아무리 빠르게 돌아갈지라도 나의 속도에 유연하게 맞추어 미래를 새롭게 빚어가 보기로 했다. 물레 돌리기가 처음엔 낯설고 어렵겠지만, 숙달되면 편안하고 고요한 집중을 만들어내듯, 내 삶도 그렇게 균형을 맞춰가지 않을까? 

지치고 힘들 때마다 부드러운 흙을 빚듯이 자신을 가다듬고 위로했다. 깨져도 내 손으로 다시 만들 수 있는 게 세상에 있다니 다행이다. 흙으로 소통하고 위로하는 통로가 되어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의 작품 사진- flowery mountain 화병 시리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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