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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토스 Jul 20. 2024

식재료 고난

모든 것이 시드는 인도의 7월

 질서 정연하게 서 있는 카트 무리는 충직한 신하들처럼 나를 우러러본다. 그중 하나를 간택하여 힘차게 내딛는 나의 발걸음을 눈치챈 자동문이 온몸을 움직여 어서 들어오라고 나를 영접한다. 빨리 와서 내가 가진 식재료들을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손으로 만져 보고 너의 오감을 총동원하여 경험하라고. 그리고 종내는 그렇게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것들을 너의 카트에 아낌없이 담으라고. 활짝 열린 자동문으로 흘러나오는 에어컨의 냉기가 카트 손잡이를 쥔 내 손에 내려앉는다. 그렇다, 신나는 마트 쇼핑이 시작됐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줄 몰랐던 트레이더조 매장 

 아이의 긴 여름방학, 나는 아이와 함께 미국과 영국을 한 달간 여행했다. 두 나라 다 예전에 여행해 본 나라들이지만 하나는 세계를 주무르는 현재의 초강대국, 또 하나는 세계를 지배했던 과거의 초강대국이자 둘 다 영어권의 나라라는 공교로운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런 의미를 담아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긴 비행시간에 지쳤으면서도 내가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동네 마트에 달려간 일이었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굉장히 좋아하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의 식재료로 요리를 해 먹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마트 쇼핑을 좋아하는 내가 더욱더 마트 쇼핑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인도에 살기 시작하고부터인 것 같다. 여기서 마트란 육해공 고기가 있고 과일, 채소를 취급하며 각종 냉동식품과 냉장식품, 과자, 소스, 유제품 등을 판매하는 곳이다. 인도에서는 그런 마트를 찾기가 힘들다. 우선 인도 사람들은 소고기(Beef)를 전혀 먹지 않고, 돼지고기도 거의 안 먹기 때문에 그 두 가지는 마트에서 볼 수가 없다. 고기를 안 먹으니 한국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살 수 있는 햄과 소시지도 없다. 생선도 다양한 종류를 취급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델리 지역은 내륙이라 바다 생선보다는 먹고 싶지 않은 이름 모를 민물고기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냉장 유통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아 다양한 유제품도 없다. 심지어 우유의 경우 구할 수 있는 생우유는 두 개 브랜드 정도이고, 마트 냉장칸에 진열되어 있지만 상해 있는 충격적인 경우도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우유는 대부분 멸균 우유라 한국에서는 쳐다도 안 보던 것을 인도에 와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사 먹고 있다. 치즈의 경우 한국 사람들도 좋아하고 이제는 많이 대중화된 브리나 까망베르 치즈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다 찾는다 하더라도 굉장히 비싸고(인도는 수입품에 세금을 많이 매겨서 같은 브랜드 상품이라 해도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브랜드도 거의 한 종류뿐이다. 


 백 번 양보해서 고기 생선은 한국에 나갈 때 공수해 온다 치고, 우유와 치즈는 없어도 죽는 거 아니니 안 먹는다 치자. 정말 심각한 건 매일 먹는 과일과 채소다. 날씨가 좋을 때야 괜찮지만 섭씨 40도가 훌쩍 넘는 날들이 두 달 내내 계속되고 나서 비가 내리는 우기를 지난 지금과 같은 계절이 제일 문제다. 지금은 과일도 채소도 신선하지 않다. 내가 자주 애용하는 야채과일상의 야채도 여행 다녀와 보니 계절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쫀쫀해야 할 파파야 껍질은 수분이 다 빠져나가 버석거리고, 토마토도 물렁거린다. 상추 같은 잎채소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말라비틀어진 몰골로 매대를 차지하고 있는 게 내가 다 무안할 지경이다. 그런 야채 과일 위로 수백 마리의 파리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광경까지 보면 눈앞이 아찔아찔하다. 내가 일주일 전에 에어컨 냉기를 쐬며 우아하게 거닐었던 미국과 영국의 마트가 겹쳐지며 지독한 현실을 깨닫는다. 그래, 여긴 인도다. 정신 차리자!

마트에서 시들어가는 상추를 발견했을 때 나의 절망적인 상태를 그려달라 했더니 챗GPT가 그려준 그림. 실제로 인도 마트의 냉장칸 채소 상태보다 훨씬 더 푸릇하게 나왔다. 

 재래시장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물건을 파는 슈퍼마켓 체인도 이 계절에 예외는 아니다. 냉장 야채칸에서도 시들어가거나 곰팡이가 핀 식재료를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신선도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것이다. 먹을 것을 사랑하는 나에게 이런 식재료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다. 인도는 내게 장 보는 즐거움을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 신선하지 않은 식재료를 보는 고통까지 안겨 주었다.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하얀 곰팡이가 있는 토마토를 보는 건 고통이다.

 계속 물러터져서 끝을 도려내고 도려내 짜리 몽땅해진 길이의 당근과 파를 보는 건 고통이다.

 시들시들해져 서로 말라 붙은 상추를 보는 건 고통이다.

 까만 반점 곰팡이가 핀 양파를 보는 건 고통이다.

 그 채소 위로는 반드시 수백 마리의 파리가 흩어졌다가 모인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니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식재료를 사러 간 야채과일상에서 내가 마주한 광경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익숙하게 보아온 풍경이었지만 천조국(千兆國)과 대영제국(大英帝國)의 마트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던 나는 새삼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우울해졌다. 이제 다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인도는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충격적으로 공격해 오는 나라다. 그것도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모양새로 말이다. 그 충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나면 찾아오는 건 무력함과 우울감이다.


 이미 이렇게 충격받을 걸 예상하여 나는 미국과 영국에서 식재료를 잔뜩 사 왔다. 각종 햄과 치즈와 빵, 드레싱과 과자 등등을. 그것들을 매일 조금씩 아껴 먹으며 나는 행복하고 풍요로웠던 마트 쇼핑을 상상한다. 에어컨이 켜진 거실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나는 미국의 어느 한 마트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냉장고와 냉동고들이 위풍당당 도열한 청신한 복도로 카트를 밀고 천천히 걸어가며 나는 그 안에 가득가득 채워진 각종 유기농 채소와 야채들을 본다. 한치의 쇠락과 부식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비장한 기세로 그들을 무장한 비닐과 플라스틱 패키지는 그 어느 신하보다 믿음직하고 충성스럽다. 이리 뒤집어도 저리 뒤집어도 물러터진데 하나 없이(곰팡이가 웬 말이냐!!!!) 알알이 탱글탱글하고 싱싱한 블루베리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위로와 행복이 밀려온다.

트레이더조 냉장칸의 각종 유기농 채소와 야채들. 질이 좋은데다가 값도 싸다.

 이제는 고기 코너로 가본다. 소고기의 천국 미국과 영국. 가격은 한국보다 훨씬 싸고, 질은 말할 것도 없이 너무 좋다. 안심, 등심, 채끝, 양지 등등 내가 아는 모든 부위의 고기가 신선한 냉장칸에 진열되어 있고 모르는 부위의 고기들도 너무 많다.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도 있다! 지금 당장 구워 먹어도 좋은 두툼한 목살, 숭덩숭덩 썰어 넣고 김치찌개 끓여 먹고 싶은 삼겹살, 그리고 냉동이 아닌 생베이컨까지. 소고기와는 확연히 다른 선홍색의 빛깔을 보니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절친을 마주한 양 눈물이 고인다. 그래, 이게 돼지고기 빛깔이지.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주는 마음의 풍요함에 이미 배불러 인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고기인 닭고기 코너는 황급히 지나쳐간다. 아직 볼 게 너무 많으니 말이다.


 그다음은 소스 코너다. 이탈리아 어느 작은 휴양 도시에 있는 레스토랑 오너 셰프의 레시피가 담긴 파스타 소스부터 아이들 입맛을 제대로 저격할 달콤하고 짭짤한 내가 아는 그 맛 토마토소스까지, 토마토소스만 해도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이 세상 모든 맛을 다 보여주겠노라고 앞다투어 이름표를 달고 있는 수백 가지 드레싱과 스파이스는 이름만 보고 그 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갈 지경이다. 여기까지 구경했는데도 아직도 많은 코너가 남아 있다. 갈길이 바쁘다.

드레싱, 스파이스, 주스. 보기만 해도 재미있는 코너들.

 소프트부터 하드까지 식감과 향이 5단계로 분류된 슬라이스 치즈, 부드럽고 꾸덕한 브리치즈부터 단단하고 콤콤한 꼼테 치즈, 종류별로 다 쓸어 담고 싶다. 요거트는 또 어떤가! 레몬, 체리, 열대과일 등 이 세상 모든 과일을 넣은 다양한 종류의 요거트는 하루에 한 가지 맛만 먹어도 그 모든 맛을 먹어보는데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다.

 

 냉동식품 종류는 더 어마어마하다. 레스토랑가서 메뉴 고르는 일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게 바로 냉동식품 고르는 일일 것이다. 전자레인지에 넣기만 해도 훌륭한 한 끼를 완성시켜 줄 피자와 라자냐,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면 금방 튀겨낸 것처럼 바삭거리는 해시브라운, 리코타 치즈와 시금치를 넣은 라비올리,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방금 구웠다 해도 손색없을 두툼한 버거 패티 등 내가 아는 모든 음식이 다 냉동식품으로 출시되어 있다. 품절 사태를 빚고 난리난 트레이더조 냉동 김밥도 있다. 그 옆의 아이스크림 코너에 이르면 무아지경이 된다. 하겐다즈, 벤앤제리, 할로탑 등 무궁무진한 브랜드의 엄청난 맛의 아이스크림들을 맛보려면 한 달로도 부족하다. 한 입만 먹어도 일주일치 권장 설탕량을 다 채울듯한 피넛버터 쿠키 도우부터 하나에 50kcal 밖에 안 하는 유기농 무색소 무설탕 아이스바... 시간이 없어서 벤앤제리 파인트 한통 못 먹고 온 게 너무나 분하다.


 자, 그러나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한동안은 식재료 고난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리라. 장을 볼 때마다 우울해질 것이다. 이 충격은 인도에서 사는 내내 계속되겠지. 여행을 다녀오면 더 심해질 것이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고 먹는 걸로 힘을 얻는 사람인데 어쩌다 인도에 와서 살게 되었을까. 너무나 가혹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된 지금 이 시점에는 소고기를 구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초긍정 마인드 따위 통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은 뉴욕 유토피아 베이글 가게에서 사 온 에브리띵 베이글에 트레이더조 유기농 랜치 소스를 바르고 막스앤스펜서에 사 온 에멘탈 슬라이스 치즈와 허니 로스티드 햄을 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줄 몰랐던 미국과 영국의 마트를 마음껏 그리워할 테다. 아! 로메인과 토마토는 어쩔 수 없이 인도에서 산 걸 넣어야 하겠구나! 샌드위치 하나에 북아메리카, 유럽, 남아시아 3개 대륙이 들어있다 생각하니 내가 진정 코스모폴리탄이 된 느낌이다. 이런 생각에 실소가 나온다.


 이 고난 또한 지나가리라, 이 계절 또한 지나가리라. 인도의 총공격에 아무렇지 않아질 날이 반드시 또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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